중견시인 천양희·노향림 신작 시집 잇따라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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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우는 날로 식어가는 휑한 바람과 환한 햇살. 지난 계절의 열정과 죄를 옥양목처럼 하얗게 빨아 말리고픈 계절. 깨끗한 외로움만 깊어가는 계절에 삶도 시도 가을인 중견시인 2명이 시집을 내놓았다.

천양희씨는 5번째 시집 '오래된 골목' , 노향림씨는 4번째 시집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을 최근 창작과비평사에서 같이 출간했다.

"나뭇잎들이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는 날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바람소리 가을이 늦었다고 투덜댑니다 숲은 또 다른 것들을 품었는지 만삭의 배를 내밀고 일찍 씨 떨군 나무들의 열매가 붉습니다 붉은 것들이 타는 속을 부추깁니다 한살이 끝낸 벌레들이 땅끝으로 숨는 때, 나는 스스로 붉게 타는 나무들의 속이 궁금해집니다 맘 속이 뿌리 속보다 깊어지는 하루하루의 길이 사람의 길이라서 산 끝이 올려다 보입니다 산길 오르고서야 평지에도 바람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아냅니다. "

65년 '현대문학' 으로 등단한 천씨는 시집 '마음의 수수밭' 등을 통해 자연을 끌어들이며 고단한 삶의 각성의 세계를 보여줘 소월시문학상.현대문학상등을 수상했다.

이번 시집에도 삶에 대한 지독한 각성이 편편에 들어 있다.

위 시 '가을산' 일부에서 잘 드러나듯 천씨의 시들은 자연, 즉 나 아닌 다른 것들을 마음 속으로 깊이 끌어당겨 살아 있게 한다.

시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온 자연이 다시 시인의 목소리를 빌어 우주적 삶의 깨달음을 들려주게 한다.

"하늘이 날 내려다본다 내가 날 내려다본다 내 몸 끝이 벼랑이다 더이상 내려갈 수 없다 산길도 끝이 있어 주저앉는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까치가 각각각 (覺覺覺) 깨우친다. " ( '2월' 중) .

우주 속으로 깊고 넓게 퍼지는 인간의 혼, 혹은 각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깊이를 천씨의 시들은 품고 있다.

한번의 인간적 깨우침이 절창인 것을, 그 깨우침에 오래 '주저앉아' 말로 상투화돼고 있는 안타까움도 이번 시집은 보이고 있다.

"내릴 손님이 없어 폐쇄된/시골 간이역에서/낭자하게 피흘리는 선홍빛 샐비어 꽃/문득 철길을 따라 걷는 가을이/맨손으로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지며/선연한 피들을/닦아주고 차마 돌아서지 못한다. " 간이역 화단에 핀 샐비어에 머문 가을 바람을 묘사하고 있는 노씨의 시 '위로' 전문이다.

70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노씨는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등의 시집을 펴내며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소묘한다.

그 벌거벗은 대상에 노씨는 따뜻하고 아련한 여심을 색칠하고 있다.

천씨가 자연을 괴롭게 끌어앉아 우리 삶을 우주까지 확산시키려는 뜻을 중히 여긴다면 노씨는 자연은 자연대로 살려두며 정을 표나지않게 덧씌우고 있다.

"가을이 깊다. /도란도란 속삭이며/뜨거운 몸을 알맞게 식혀서/땅 위에 식물들을 널어놓는다. /마음껏 열정들을/내다 말리고 있다.

/마을의 처마 낮은 굴뚝마다/연기 사라진 지 오래 되고/길가 빈 짐수레에도/깊은 가을이 텅텅 비어 실려 있다. /푸른 날들이 금세/몸 가벼이 비어서/쌓여 있다. "

깊은 가을 빈 모습과 소리가 새어나올 것 같은 노씨의 시 '약속' 일부다.

익을대로 익은 삶의 뜻과 정이 들어 있는 두 시인의 시집이 깊어가는 계절의 외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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