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공연 예술인 ① "남성들 눈빛이 더 뜨거워" 男밸리댄서 1호 전천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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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 하루에도 수만 명이 바쁘게 오가는 복잡한 지하철역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눈에 사로잡는 남자가 있다.

화려한 액세서리를 두르고 요염하게 허리를 흔드는 밸리댄서 전천을(32)씨. 그는 키 1m88㎝에 몸무게 84kg의 건장한 남성이다. 자신의 공연단원 10여 명과 함께 한 달에 두 번씩 토요일 오후 4시 선릉역에서 밸리댄스 공연을 선보이고 있는 그는 국내 최초의 남성 밸리댄서다. 남성미 넘치는 외모의 그가 왜 여성보다 더 요염한 춤사위를 보이고 있을까.

남성복 모델로 일하던 그가 '뜬금없이' 밸리 댄스를 시작하게 된 때는 지난 2001년이었다. 당시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전씨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한창이었다.

"모델 일은 아무래도 미래가 불확실했어요. 평생 직업이 아닌 프리랜서 개념이라 어떤 날은 바쁘게 지내고 어떤 날은 백수처럼 지내기도 했죠. 수익 면에서는 나쁘진 않았지만 막 결혼을 했을 때라 미래를 생각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한 순간 저에게 기회가 찾아왔어요."


2001년 가을 그는 한 백화점에서 겨울 의상 패션쇼를 하고 있었다. 오프닝 초청공연으로 여성 무용단의 밸리댄스 공연이 펼쳐졌다. 딸랑딸랑 소리 나는 액세서리를 허리에 두르고 화려한 화장과 의상을 입은 여성들의 춤이 그의 눈을 사로 잡았다. 당시만 해도 밸리댄스가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는 무용단에게 다가가 물었다. "지금 하신 게 대체 뭔가요?" "이건 밸리댄스라고 하는 거에요." "남자도 할 수 있나요?" "아직 남자 중에서는 하는 분이 없어요. 외국에서나 모를까…"

순간 그의 머릿속에 번쩍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저는 항상 무엇이든 남 보다 제가 먼저 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그때 생각했지요. 국내 남성1호 밸리댄서가 되자고요. 그때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몸치, 박치, 음치로 흔히 말하는 '3치'였다.

"모델 일을 하려면 무대 위에서 연기, 춤 등 나름대로 많은 걸 보여줘야 해요. 그냥 걸어갔다 오는 것이 전부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춤에 대한 욕심이 평소 많았는데 막상 몸은 따라주질 않았어요. 밸리댄스를 직업으로 삼겠다고 하니까 아내는 제가 조금 하다 말겠지 싶었대요. 아무튼 죽어라 연습을 했어요. 의외로 재미있고 스텝도 별로 없어 처음엔 쉬웠어요. 하지만 배울수록 정말 어려운 춤이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라 용기 하나로 시작한 것 같아요."

땀을 흘려 열심히 연습한 끝에 지금은 무대 위에서 소위 '날아다닌다'. 그의 공연 철칙은 관객들과의 호흡이다.

"저희 팀은 공연 할 때 관객들과의 호흡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즐겁게 춤을 추면 보시는 관객 분들도 굉장히 즐거워합니다. 소리도 지르고 박수도 유도하면서 저희도 함께 즐기는 거에요. 지하철역은 사람들이 굉장히 바쁘게 지나가는 곳이죠. 그런 분들을 저희가 1시간 동안 '잡고' 있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재미가 없거나 볼 거리가 없으면 그냥 가십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보고 기분 좋게 즐기다 가시는 분들이 참 많죠. '끝나고 잘 봤습니다'하고 인사를 건네주시는 분들 보면 힘이 번쩍 나요."


전씨는 봉사 활동부터 칠순 잔치, 리셉션 행사 등 다양한 공연을 다니고 있다. 웃지 못할 일도 많이 벌어지고 힘든 일도 많이 겪는다. 전씨가 말하는 가장 고역은 맨땅의 학교 운동장에서 맨발로 춤추기다.

"저희 공연 특성상 맨발로 공연하는 경우가 많아요. 한번은 모래 바람이 휘날리는 초등학교 운동장 한복판에서 맨발로 춤을 춘 적이 있어요. 운동장에서 맨발로 춤 춰보셨나요? 정말 미칩니다. 무지 아파요.(웃음)"

공연 중 늘 박수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남성이기 때문에 겪었던 설움도 있다. "지난 봄 군 부대 위문 공연을 갔어요. 군부대에서는 남자를 잘 반기지 않죠. 여자 무용수가 공연하고 나서 제가 딱 올라 갔는데 반응이 아주 최고(?)였습니다. 생전 첨 들은 야유라 당황스럽더군요. 하지만 제 춤을 보시더니 '우~'에서 '오~' '와~'로 바뀌었어요. 참 좋은 경험이었지만 그래도 군 부대는 아직 제가 갈 곳이 아닌 것 같아요."

"한번은 초등학교 총동창회 체육대회가 있는 곳에 초청을 받아 공연을 하러 간 적이 있었어요. 운동장에서는 축구 대회가 벌어지고 있는데 뜬금없이 단상에서 공연을 시작하게 된 것이죠. 선수 분들이 "경기 중에 집중 안 되게 뭐 하는 것이냐"면서 화내시더라고요. 저희는 하라고 해서 한 것 뿐인데…. 그래도 묵묵히 하고 내려왔습니다."

요염한 춤 사위에 성(性) 정체성을 의심받은 적도 있었다. "액세서리 런칭 쇼에 초청을 받아 공연한 적이 있는데 끝나고 한 남성 관계자가 그러시더군요. '너 너무 섹시하다'고요. 모델일 하면서 어느 정도는 그런 분위기는 알고 있지만 밸리댄스 하면서 직접적으로 들은 적은 처음이었거든요. 충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즐기죠. 외국에서는 밸리댄서 중에 게이인 경우도 있대요. 그래서 그런가 외국인들의 눈빛이 특히 뜨거워요."

현재 그는 백화점 문화센터, 휘트니스센터 등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강의를 하고 있다. 다음주에는 '굵직한' 대회를 앞두고 있다. 강원도 양구 '국토 정중앙 배꼽 축제' 기간 중 14~16일 코리아 오픈 밸리댄스 챔피언쉽이 열리는데 그는 여기서 프로부문 심사위원으로 참가한다. 그리고 자신의 팀원들과 함께 14~15일 저녁에는 갈라쇼와 거리퍼레이드, 난장 파티, 디너쇼 등을 연다.

"모두 개인 일을 마치고 밤 11시에 모여 연습을 시작해요. 끝나면 새벽 2시가 넘어요. 저희에게 주어진 20분의 공연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춤은 젊었을 때만 출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중년의 계획이 궁금했다. "저는 나이가 들어서도 외모로는 '동안'이 되도록 꾸준히 가꾸어서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계속 춤을 추고 싶어요. 밸리댄스가 너무 상업적으로 붐을 일으켜서 '이건 아니다'생각한 것은 오래 전이었습니다. 앞으로 예술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춤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어요. 그리고 좀 더 많은 남성들이 밸리댄스에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김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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