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의 정치Q] '노무현 판사'와 형 건평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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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9월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31세의 노무현은 대전지방법원 형사합의부 판사가 됐다. 말단인 좌배석이었지만 판사는 그의 인생에서 제대로 된 첫 직업이었다.

그때까지 노 대통령의 인생은 야생마 생활이었다. 69년 부산상고를 졸업했지만 그는 성에 차는 직업을 갖지 못했다. 집앞 산기슭에 토담집을 짓고 고시공부를 시작했지만 가난 때문에 전념할 수도 없었다.

그는 울산 한국비료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곤 했다. 일거리가 많지 않아 청년 노무현은 닭을 훔쳤고, 밥값 2000원을 떼어먹고 도망치기도 했으며, 목재에 얼굴을 부딪혀 이 3개가 부러지기도 했다. 노무현 인생의 '잡초기(期)'였다.

그러다 그는 판사가 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법부는 잘 짜인 상급사회였다. 모든 것은 규칙과 관행으로 돌아갔다. 판사가 변호사의 술접대를 받는 것도 관행이었다. 초임판사 노무현은 대부분 그런 분위기에 어울렸다. 술도 많이 마셨고, 선배판사와 함께 '짠돌이 변호사'를 욕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 판사가 규칙을 완전히 깬 것이 하나 있다. 판사는 법정 밖에서 소송 당사자를 만나는 것이 금지됐는데 그는 이를 어겼다.

어묵에 방부제를 섞은 식품 범죄자가 기소된 사건이 있었는데 노 판사는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합의부는 유죄를 선고했다. 노 판사의 얘기를 전해들은 어묵업자는 술을 사들고 노 판사 집을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했다. 노 판사는 그와 같이 술을 마셨을 뿐 아니라 밤을 새워 그 사람의 항소 이유서까지 써줬다. 그 후 노 판사는 그와 친해져 가끔 술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는 상당한 일탈(逸脫)이었다. 노 대통령은 훗날 이 일을 많이 반성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서전에 "지금 생각해도 판사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나는 엉터리 판사였다"고 적었다.

수뢰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훈계를 들은 노건평(노 대통령의 작은형)씨가 재판장에게 '항의성 전화'를 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건평씨가 어떻게 해서 "유죄를 받은 피고인이라도 억울하다 싶으면 법정 밖에서라도 판사에게 말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됐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만약 동생인 노무현 판사가 고향집에 내려와 '어묵 사건 무용담'을 얘기했고, 형이 그것을 의미있게 새겼었다면 노 판사의 궤도 이탈은 더욱 씁쓸한 추억이 될 것이다.

김진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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