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국민 골탕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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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기아 (起亞) 처리는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지난 정권에서 5개월, 현 정권에서 10개월, 모두 15개월이나 걸렸는데도 말이다.

기아처리를 질질 끄는 바람에 환란 (換亂) 을 불렀다고 몰아세웠지만 새 정권 역시 별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간의 기아처리는 참으로 값진 교훈을 담고 있다.

우선 세차례의 입찰과정에서 투명성과 절차에 손색없는 모범답안을 썼다.

거듭되는 유찰을 무릅쓰고 말썽의 소지는 일절 용납하지 않았다.

특히 '애꿎게 책임을 뒤집어 쓸 가능성' 에 대해서는 철저히 피해 나갔다.

지난 정권때부터 그랬었다.

애당초 부도유예협약이라는 것을 만든 것도 그 속뜻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이월과 책임회피에 무게를 실었던 것이다.

잠시 15개월전을 회고해 보자. "기아의 3자인수는 결코 없을 것" 이라던 정부 당국자의 공공연한 다짐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였나. 이름하여 국민기업인 기아를 특정 재벌한테 넘긴다니 말이나 되느냐는 불호령은 기아 사람뿐이 아니었다.

다수 언론들도 호응했고, 60개 시민단체들은 '기범련 (기아살리기 범국민운동연합)' 이라는 것을 결성, 시민운동이랍시고 요란을 떨었다.

기아 살리기는 양심세력들이 추구하는 지고 (至高) 의 선이요, 3자인수 추진은 못된 무리의 사악한 흉계쯤으로 치부됐다.

민주노총을 비롯해 노동계는 대동단결해 정치적 음모와 재벌의 야욕을 분쇄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었다.

기아처럼 중요하고 훌륭하고 귀중한 기업을 왜 은행이 외면하고 부도를 내려 하느냐며 흥분했다.

그처럼 대단하다던 기아의 실체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최근의 입찰과정에서 증권시장이 여실히 보여줬다.

인수기업으로 떠오르기만 하면 그 재벌의 주가는 가차없이 폭락했다.

기아는 보물단지가 아니라 재앙 (災殃) 을 몰고 올 흉물단지였음을 증명했다.

그나마 3차입찰에서 낙찰된 현대가 제시했던 부채 탕감액수는 무려 7조3천억원. 지난 80년의 정부예산 (6조5천억원) 을 몽땅 털어넣어도 8천억원이 모자라는 돈이다.

그동안 기아를 국민기업이라며 큰소리쳤던 '양심세력' 들, 요즘은 어딜 가

있기에 이리 조용한지 궁금하다.

수조원의 빚을 깎아주고 "제발 좀 기아를 가져가 주십시오" 하며 통사정해야 했던 최근 현실을 보고 이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3조원에 달하는 적자를 감췄던 거짓회계까지 뒤늦게 밝혀진 것을 보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더구나 그 엄청난 빚더미의 탕감이 결국 국민의 세금부담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은 또 뭔가.

아이로니컬하게도 현대.대우.삼성 가릴 것 없이 이들 모두가 당시 기아노조나 기범련 사람들에게 크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들이 3자인수를 강력히 반대하지 않아 이들중 어느 재벌한테 기아가 신속히 인수됐더라면 지금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말이다.

세차례 입찰을 통한 부채탕감 요구도 하지 못했을 것이요, 감춰졌던 분식결산 사실도 모른 채 덥석 떠안았을 것 아닌가.

만약 그랬더라면 어느 기업이 됐든간에 지금쯤 기아인수 부담으로 말못할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기아의 3자인수를 진작 결정했더라면 정말 환란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많다.

분명한 것은 15개월이나 질질 끄는 과정에서 치러야 했던 국가적 비용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는 사실이다.

물론 기아처리를 지연시킨 요인은 복합적이다.

표에 눈이 멀었던 정치인과 기아 사람들의 억지를 비롯해 정부당국의 눈치보기, 언론의 바람몰이 등 - .여기에 더해 뜻밖의 요인이 또 하나 있다.

소위 절차의 투명성이라는 것. 말로만 떠들던 투명성제고가 얼마나 비싸게 치이는가를 기아사태는 철저히 보여줬다.

말썽많던 골칫덩이였던 만큼 눈곱만큼의 오해소지가 없도록 밟아야 할 절차는 모조리 밟아야 했다.

시간을 끌수록 기아는 골병이 들어갔고,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갔으나 누구도 이를 시비하지 않았다.

공연히 나서다 국민기업 주창세력들에 칼침을 맞거나 그렇지 않으면 쇠고랑이나 찰 위험부담을 왜 자초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시간낭비.돈낭비의 부담이 에누리없이 국민 모두에게 얹히고 있지 않는가.

기아는 국민기업이 아니라 국민골탕기업이었던 셈이다.

이젠 더이상 국민기업이니 뭐니 하는 어설픈 소리는 그만하자. 누가 무슨 사업을 하든간에 돈 잘 버는 기업이야말로 진짜 국민기업이요, 그 반대는 반 (反) 국민기업이다.

이장규(경제담당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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