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북한탐험]10.황해도의 빈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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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비가 온 뒤의 아침은 종교적으로 청정했다.

공기는 사뭇 달고 풍경은 그 속사정이야 어떤지 모르나 생기를 뿜어냈다.

눈에 들어오는 사물들은 방금 새겨낸 조각처럼 분명했다.

내 마음도 그런 사물을 받아들이도록 막 씻어낸 거울을 담고 있었다.

대동강 충성의 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물은 비 온 뒤이기도 해서 탁류였다.

또한 강의 북쪽과 남쪽에 마주 선 60년대식 화력발전소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강을 건너 개성 1백53㎞의 도로표지판을 지나쳤다.

얕은 구름이 천막을 친 듯했고 그 아래 비산비야는 오랫동안 일해온 숙련공처럼 어디 하나 어색한 데가 없었다.

자라나는 논 곡식은 금비 (金肥)가 모자라 진초록빛이 아니었다.

밭의 강냉이도 땅의 넉넉한 힘이 아닌 저 자신의 힘으로 애써 자라난 것처럼 풍성하기보다 단단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황해북도는 태연자약한 대지였다.

나는 여기서 내가 살아온 60년대를 떠올려 그것이 여수 (旅愁)가 되었다.

60년대라면 분단 자체가 우렁찬 역사 (力士) 처럼 그 이외의 모든 가치를 찍어누르고 있는 시기였다.

휴전선은 아직 철조망을 두를 형편이 아니었으나 철조망 이상으로 그 분단의 벽은 높고 그 이쪽 저쪽은 항상 전쟁에 준하는 높은 긴장이었다.

그런 시기, 남한의 젊은 새 (鳥類) 학자 원병오 (元炳旿) 는 서울 홍릉 임업연구원에서 희귀철새 북방쇠찌르레기 한마리를 붙잡아 그 발목에 표지 반지를 끼워 날려보냈다.

1963년의 일이다.

그 새는 동남아 어디선가 겨울을 나고 왔다가 1965년 평양 만수대공원에서 그 곳의 원로 새학자 원홍구 (元洪九)에게 잡혔다.

그는 북한 과학원 생물학연구소 소장인데 바로 남한에 있는 원병오의 아버지였다.

35세의 아들과 78세의 아버지는 한마리의 철새를 통해 남과 북을 극적으로 이어놓은 것이다.

아버지는 그 새를 아들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으로 박제해 연구소에 두고 있다가 5년 뒤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세월이 쌓여가며 분단은 더 강화되지만 제한된 교류와 교역이 가능하게 됐고 이런 교류의 하나로 내가 황해도 땅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길은 마음껏 뻗어 있다.

거의 들쥐 한 놈 가로지르는 일 없는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햇빛이 그 길을 비춰주니 길은 영영 하얗다.

어쩌다 승용차 한대가 스치고 나면 더욱 길은 텅 비어 있다.

그러고 보니 북한의 많은 지역에는 길의 문화가 없다.

야간의 수송이 어느 정도 있다고는 하지만 물류나 수송 등 교통의 의미는 여행의 의미와 함께 북한사회에서는 낯설기까지 한 것이었다.

길은 누구나 가라고 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할 이유가 성립될 때만 갈 수 있다.

노자 도덕경은 가장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이웃마을에도 오고 가서는 무위가 아니라고 야릇하게 말한다.

나는 그런 무위에 대해 움직이는 무위, 어디로 가는 무위를 주장하고 싶은 사람이다.

인간이나 동물에게 어디론가 이동하는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런 세상이 과연 무위자연의 낙원일까. 남한의 길은 온통 차로 채워져 혼란의 길이고, 북한의 길은 사람의 길이기보다 체제의 길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일어난다.

나는 안내자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내왕이 없습니까?" "그건, 내왕의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왕할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내왕하면 됩니다. " 나는 북한 사람들과 토론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입은 이내 다물었다.

북한은 원칙적으로 사람의 이동이나 여행이 허가제다.

고향의 친상을 당해도 거주지 당국의 허가를 거치는 것이 옳다.

또한 북한에서 먹는 일은 배급제로 해결한다.

양권 (糧券) 의 식생활이 그것이다.

아마도 평양 옥류관이나 청류관, 그밖의 이름난 음식점 출입도 그곳 주민들에겐 일정한 관례가 있는 것 같았다.

먹는 일과 오가는 일 이외에도 직장도 저마다의 뜻대로만 들어가고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당과 정부 안에 충성스럽게 속해 있어야 한다.

평양~개성의 고속도로는 시멘트 포장의 길이다.

몇해 전 개통됐으므로 말쑥했다.

이제 옛 시대의 험준한 자비령 산길로 서울과 지방이 연결되는 대신 경의선 철도가 있고 이렇게 고속도로가 있는 것이다.

고려말 이색 (李穡) 도 자비령 넘는 느낌을 노래한 바 있고 가까이는 벽초나 황석영의 소설들이 서흥.재령 등의 고장을 그 무대로 삼고 있다.

풍요의 해서 (海西) 인 황해도는 옛날에도 중국의 사신들이 지나가는 길이고 산과 들과 바다의 산물이 늘 넉넉한 곳이다.

서울 서대문과 평양 대동문 사이의 왕래 또한 그곳을 통해 빈번한 것이었다.

그런 길목이라면 봉물짐이나 부담을 털고 토호들에게 뜯어내는 도적떼의 출몰도 빈번했다.

하지만 내가 황해도의 대동강 남쪽 치아포나 황주.사리원 등의 지명을 알게 된 것은 김구의 '백범일지' 때문이었다.

막걸리 한 말 두 말을 마시던 엄청난 폭음의 주량이나 웬만한 밥 한 솥을 다 비우는 그 뱃구레의 젊은 의사 (義士) 는 그렇게 겨레의 거인에 몸집으로도 값했던 것이다.

오늘의 황해도 길에서 인걸은 간 데 없는 그것 말고도 모든 산들이 민둥산이라는 서글픈 풍경과 만나야 한다.

그런 민둥산 아래에 "쌀은 공산주의다!" 라는 구호 간판이 설치되고 단층짜리 농가들이 한 줄로 나란히 동작의 부동자세로 서 있는 부근의 논두렁에는 "김매기 전투에로!" 라는 간판이 괴괴하게 서 있다.

그러다가 산등성이에 무표정하게 서 있는 일곱살 쯤의 아이가 염소 서너마리에게 풀 뜯기는 것을 보았다.

애잔했다.

들 한복판의 경의선 철로 부근에 있는 규모있는 공장도 스쳤는데 굴뚝에서 연기가 난 지 오래였고 공장 창은 유리가 깨어진 채 바람이 숭숭 드나드는 것이었다.

아마도 녹색의 산과 들이 아니었다면 천혜 (天惠) 의 곡창지대인 그곳은 내 눈에는 환각이 아닌가 싶게 황량한 잿빛만으로 채워졌을지 모른다.

우리가 쓰던 말 중에 '조선 반 (半) 만큼 컸다' 는 것이 있는데 지금 한반도의 절반이든 다이든 할 일이 참 많은 것 같았다.

글 = 고은 (시인.경기대대학원 교수)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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