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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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그렇지 않아도 골칫거리였던 조창범을 빼내간 것은 어쩌면 속시원하게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앓던 이빨도 빼고 나면 허전한 것이고, 미운털이 박힌 의붓자식도 죽고 나면 애석하고, 기꺼이 이혼한 여자도 재혼한다는 소문 들으면 질투가 나는 법이다.

성가시던 조창범이가 윤종갑과 합류할 줄 알았더라면 밉상으로 보이더라도 데리고 다녀야 했었다는 후회까지 들었고, 태호까지 흔들린다면 대들보가 내려앉는다는 불안이 철규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정객들처럼 자기당 소속 의원들을 빼내간다고 단식투쟁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그 사람들 단식투쟁하면 신문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려 세상이 들썩하겠지만 황태팔이 노점상 한철규가 윤종갑을 상대로 단식투쟁 벌인다면, 존귀하게 여겨서 동정해줄 사람은커녕 장바닥에서 가부좌 틀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썩은 나무둥치로 알고 개가 와서 오줌이나 갈기기 딱 알맞았다.

고심하던 끝에 우리 농산물과 수입 농산물을 비교하는 전단을 마련하여 장꾼들에게 뿌리기 시작했다.

물론 황태 매상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지만, 그것이 한씨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계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골 시장을 돌아보아도 수입 농산물이 토종 농산물로 둔갑되어 팔리거나 토종과 수입 농산물을 뒤섞어 우리 농산물로 속여 파는 상인들이 허다하였다.

원산지 표시를 조작하는 것쯤은 이제 다반사가 되어서 이제 와선 속임수로 취급하지도 않을 정도로 상거래 양심이 퇴색되고 있었다.

특히 추수기를 맞아 어디서 어떻게 들여오는지 번지도 주소도 없는 농산물들이 시골장터까지 밀려들어 가을에 추수한 농산물로 둔갑해서 싸구려를 부르고 있었다.

한씨네가 뿌린 전단에는 가을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잡곡들을 골라 토종과 수입품의 형태적 차이점을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토종 마늘은 잔뿌리가 거의 완전하고 마늘 쪽의 크기는 다소 작지만 매우 조밀하게 붙어 있고 껍질도 붉은색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수입품은 낟알을 벗긴 채로 팔거나 뿌리털이 깨끗하게 절단되고 껍질은 희고 마늘 쪽의 수효는 많지만 붙어 있는 간격도 토종보다 조밀하지 못하다.

토종의 흰콩은 껍질이 얇고 깨끗하고 배꼽선이 황색이지만 수입품은 껍질이 두껍고 거칠며 낟알이 작고 윤기가 없다.

토종 팥은 낟알이 크고 윤기가 있으며 배꼽의 흰 선이 선명한 반면 수입품은 낟알이 작고 윤기도 없는가 하면 배꼽의 흰 선이 짧고 선명하지 못하다.

토종의 녹두는 낟알이 작고 진한 청색이면서 윤기가 나지만 수입된 것은 색깔이 연하고 윤기도 토종에 비해 떨어진다.

토종의 찰수수는 모양이 둥글고 붉은색 외피가 남아 있지만 수입품은 낟알이 타원형에 가깝고 갈색 외피가 남아 있다.

양파 역시 토종은 수입품과 비교해서 작지만 매운 맛이 진하고 껍질의 색깔도 흰 편이고 잘 벗겨진다.

그러나 수입품은 진한 갈색의 껍질이 매우 튼튼하고 매운 냄새도 느낄 수 없다.

토종의 땅콩은 대체로 동글동글한 편이고 껍질이 연한 갈색이며 겉껍질에 주름이 적지만 중국산은 외형이 길쭉하고 껍질이 잘 부서지고 진한 갈색에 겉피에 주름이 많다.

토산의 고사리는 연한 갈색에 줄기가 가늘고 잎의 손상도 가볍지만 수입품은 줄기가 눈에 띄게 굵고 잎의 손상도 심하고 줄기도 거칠다.

토종 참깨는 흰 참깨, 검정 참깨, 누런 참깨로 나누지만 대개 낟알이 작고 껍질이 얇으며 고소한 냄새가 진하다.

그러나 수입품은 알이 크고 껍질도 두껍다.

색깔도 선명하지 못하고 크기도 일정하지 않으며 고소한 맛이 진하지 않다.

토종의 대추는 산지에 따라 색과 모양이 제각각이다.

수입산과 섞어 팔아도 구별이 쉽지 않기 때문에 색깔이 선명한 것으로 식별한다.

수입품은 표면이 매우 쪼글쪼글하고 검은 빛이다.

그리고 대체로 약품 냄새가 난다.

토종 생강은 알이 작고 표면이 몹시 울퉁불퉁하지만 수입품은 그 굴곡이 토종보다 심하지 않다는 비교 판별법이었기 때문에 눈썰미가 서툰 젊은 주부들이 앞다투어 전단을 얻어갔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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