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통일의 그날이 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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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해방과 독립을 기다리던 우리 민족의 간절한 소망은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에서 읽을 수 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기뻐서 죽사오며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토록 기다렸던 해방은 독립을 가져왔지만 분단이란 혹독한 대가(代價)를 수반하였다. 일제에 나라를 강점당하였던 식민지 시기는 35년이었으나 해방의 대가로 치른 남북 분단은 64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해방의 그날을 기다렸던 민족적 염원에 비하면 오늘날 통일을 향한 국민적 열망은 차츰 식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게 된다. 일제 하에서 해방을 애절하게 기다렸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통일의 그날을 기다리는 갈망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노랫소리를 자주 듣기 어려워진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바쁜 일상의 압력과 널리 확산된 실용의 윤리가 통일이란 목표로부터 모든 긴박성을 앗아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통일, 즉 분단 극복에 대한 국민적 열의가 식어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국민이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두려움이다.

첫째로, 반세기 이상 계속되어 온 남북대결 구도 속에서 북한으로부터 끊임없이 밀려오는 군사적 위협을 실감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설득력 없이 외치는 통일 주장은 즉각적인 공감을 얻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근래에 급속히 가중되고 있는 북한의 압력, 즉 핵실험, 미사일 발사, 난폭한 용어를 동원한 선전 공세 등이 또 한번의 전쟁 가능성을 높여가고 있다는 심각한 우려는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다. 이렇듯 대결의 심화 속에서는 평화통일을 논하는 것 자체가 공허한 담론으로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로, 오늘의 한반도에선 분단 60년으로 말미암은 남북 간의 이질화가 심각한 수위에서 고착되고 있다. 냉전의 막이 내리고 동서화해가 진행된 지난 20년간 한반도에선 오히려 남북대결과 이질화가 가중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남쪽은 산업화에 더하여 민주화를 성취시킴으로써 세계화의 물결에 적극 합류한 데 반하여 북쪽은 전 국토와 국민의 고립화, 요새화를 강력히 고집함으로써 세계적인 예외 체제가 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오늘의 한국인에게는 북한의 체제와 주민이 러시아·중국·베트남보다도 더 이해하기 힘든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장 가까워야 할 동포들임에도 가장 멀어지는 기현상과 이질감으로 북한에 대한, 그리고 통일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국민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이 결국 통일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셋째로, 남북관계가 대화보다는 대결로, 긴장 완화보다는 고조로 치달으며 북한의 고립 또한 날로 심화되는 상황이다 보니 통일을 위하여 어떠한 희생과 대가를 치를 것인가에 대한 국민적 각오와 합의를 모으기 어려운 분위기가 자리 잡아가고 있다. 2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에 독일 국민이 공유하였던 정서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무작정 어려움은 피하고 싶어 하는 인간적 본능에 나라의 운명을 맡길 만큼 우매한 민족은 아니다. 8월을 맞아 광복의 그날을 생각하며 새삼 통일의 그날도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통일에 필요한 희생과 각오 없이 어떻게 주변국들에 한반도 통일이 가져올 불확실성과 경비를 감내하도록 설득하고 부탁할 수 있을 것인가.

통일의 그날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역사의 흐름에는 영원한 예외가 없다. 60년이 넘게 역사의 예외지대로 추락했던 한반도가 분단이란 수렁으로부터 탈피하려는 것은 민족의 정체성과 국민 각자의 자존심이 걸린 역사적 과제다. 통일의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자성의 시간이 되는 8월이 되었으면 한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