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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4자 맥주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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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맥주파티 연출도 할리우드의 나라 미국답다. 오바마 대통령과 하버드대 교수 게이츠는 흑인이다. 사건 당사자는 흑인 2명에 백인 1명이니 이들만 모이면 흑과 백이 2대1이다. 그래서 절묘하게 초대된 백인이 바이든 부통령이다. 4인4색의 맥주도 드라마의 멋진 소품이었다. 백악관 행사에 수입 맥주가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대통령의 맥주는 미국산 버드와이저였다. 하버드대 교수는 샘 애덤스를 마셨는데 이 맥주는 대학 근처인 보스턴에서 만들어진다. 원래 좋아했다지만 결과적으론 자기 동네를 챙기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경찰관은 캐나다산 블루 문(Blue Moon)을 시켰다. 블루 문은 원래 벨기에가 고향인데 여과하지 않은 오렌지 호박색의 짙은 맥주다. 그는 혹시 터프(tough)한 맥주로 대통령의 기를 누르려 한 건 아닐까. 부통령도 외국산을 마셨다. 네덜란드산 버클러였다. 그는 혹시 백악관에서 외국산을 마시는 손님을 배려한 건 아닐까.

겉모양은 그저 맥주회동이지만 이날의 드라마엔 두 가지 놀라운 주제가 숨어 있다. 하나는 대통령의 사과다. 오바마는 회동 며칠 전 성급하게 인종차별을 언급했던 잘못을 깨끗이 인정했다. 국가원수의 체면이나 고집보다 그는 국민의 상식을 더 두려워했던 것이다. 대통령의 사과가 없었으면 맥주회동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 다른 주제는 인종차별 문제에 보다 신중해야 한다는 미국 사회의 조용한 인식이다. 맥주 회동에서 누가 누구에게 사과하는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뉴욕 타임스는 “사과는 없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그런 얘기가 없었어도 맥주를 마신 4인이나 그들을 지켜본 국민이나 새로운 공감대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미국은 인종갈등에 보다 성숙해질 것이다.

청와대에서 4자 맥주회동이 열린다면 누가 앉아야 할 것인가. 한국엔 하도 갈등이 많으니 한두 번 회동으론 안 되고 손님도 버스로 실어 날라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첫 번째 멤버는 정해져 있다. 이명박(MB) 대통령, 박근혜 전 대표, 그리고 이재오 전 의원이다. 그리고 친이대 친박 2대2를 맞추려면 친박계 좌장 홍사덕 의원이 끼어야 할 것이다. 맥주는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국산과 외국산이 반반이면 좋겠다.

청와대 회동 역시 드라마가 되려면 두 가지 주제가 보장되어야 한다. 하나는 대통령의 사과다. 박근혜에게 ‘국정의 동반자’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걸 사과하는 것이다. 사전에 적당한 형식으로 사과가 이뤄지면 일단 맥주회동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주제는 ‘공정한 경쟁’의 약속이다. 지지율 1위 박근혜는 차기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있다. 이재오는 MB 정권의 1등 공신이다. 그는 ‘형님’이 대통령이 되는 걸 지켜보면서 자신도 정권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야망을 키우고 있다. 판마다 두 세력은 충돌하고 갈등의 회오리는 정권 내내 휘몰아칠 것이다. 정몽준 최고위원, 오세훈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지사도 있지만 여권의 삼국지는 기본적으로 박근혜-이재오 대결이 주축이다.

맥주가 갈증을 없애듯, 갈등을 푸는 건 공정(公正)이다. 대통령 오바마는 흑인과 백인 모두의 대통령이어야 한다. MB도 친이계와 친박계 모두의 대통령이어야 한다. 당권에서부터 대권의 경쟁까지 그는 여러 세력의 공정한 경쟁을 약속해야 한다. 그 길은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모두가 걸어간 길이다. 백악관 로즈 가든뿐 아니라 청와대 상춘재도 맥주 회동의 멋진 무대가 될 수 있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