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여성이 쓴 '한글 상언' 첫 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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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중의 딸인 김씨부인이 18세기 초 한그로 써 임금 영조에 올린 진정서. 79X153.5cm.

18세기 초 한글로 여성이 쓴 '상언(上言)'이 처음으로 발굴됐다. 작자는 '구운몽'을 쓴 서포 김만중의 딸인 김씨 부인(1655~1736). 김씨는 좌의정을 지내고 신임옥사(1721~22)때 희생당한 이이명의 부인이기도 하다. 상언은 임금에게 올리는 일종의 진정서. 1400자에 달하는 이 상언은 1726년(영조 3년) 국왕인 영조에게 올린 것이다. 신임옥사 때 남편과 아들을 잃은 김씨부인은 상언에서 손자 이봉상과 시동생 이익명의 구명을 호소하고 있다.

글은 "여의신만 버히오시고 봉상의 명을 빌리오셔 의부의 혈사(血嗣)를 잇고 의부제 익명을난 횡리(橫罹)하는 화를 면케 하오소서"(저만 베시고 임금께서 명을 내리어 남편의 대를 잇고 시동생 익명도 재앙을 면하게 하소서)라는 애절한 호소로 끝난다.

임형택(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장.한문교육과) 교수는 "18세기 실학 관련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상언을 발견했다"며 "상소나 상언은 남성이 한문으로 쓰는 것이 보통인데 여성이 국문으로 썼다는 점에서 특이하다"고 말했다.

이 상언이 씌어질 때는 장희빈이 활약했던 숙종대에 이어 경종-영조대에 걸쳐 당쟁이 심하게 빚어졌다. 권력을 잡기 위해 노론-소론이 엎치락뒤치락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김만중은 노론의 핵심 인물. 숙종에 이어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이 즉위하면서 노론은 탄압을 받는다. 이른바 신임옥사. 노론이 경종의 즉위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반면 경종을 옹호했던 소론은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하지만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병사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국면은 반전된다. 영조를 옹호한 노론의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영조 3년에 세상은 뒤집혀 다시 소론의 것이 된다. 정권의 실세가 짧은 기간에 뒤바뀜에 따라 김씨 부인과 손자의 운명도 오락가락했던 것이다.

이봉상은 신임옥사 때 물에 빠져 자살한 것으로 가장하고 도주한다. 이후 영조가 즉위해 노론이 집권하자 이봉상은 복권된다. 하지만 다시 소론 세상이 되자 소론측이 이봉상을 잡아들인다. 이 때 김씨 부인이 "손자 이봉상을 도주시킨 것은 나다. 나에게만 죄를 물어달라"며 상언을 올린 것이다. 마침내 이봉상은 죽음은 면했지만 12년간 유배를 당했고, 이후 은거하다 66세인 1772년 세상을 떠났다.

임 교수는 "김씨부인과 그의 손자의 인생역정이 18세기의 당파적 정당성과는 별도로 마치 한편의 드라마틱한 고소설을 읽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임 교수는 최근 간행된 학술지 '민족문학사연구'에 자료를 소개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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