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프리즘] 백악관 ‘맥주 회동’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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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달 30일 오후 6시(현지시간). 인종차별 논란의 당사자 3인이 백악관 앞뜰 로즈가든 구석의 흰색 피크닉 테이블에 앉았다. “피부색 때문에 백인 경찰에게 부당하게 체포당했다”며 격분했던 흑인 교수(헨리 루이스 게이츠), “피부색과 상관없는 정당한 법 집행”이라고 맞섰던 백인 경찰(제임스 크롤리), 흑인 교수 편에 서서 백인 경찰을 나무랐다가 경솔하다는 지적을 받고 물러선 흑인 대통령(버락 오바마).

이날 모임은 게이츠가 지난달 16일 문이 잠긴 자신의 집을 강제로 열려다 이웃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크롤리에게 체포된 게 발단이 됐다. 오바마가 지난달 22일 전국에 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서 크롤리의 행동을 “어리석었다”고 비판하면서 인종 차별 논란이 미 여론을 달궜다. 그러다 오바마가 크롤리와 전화 통화를 하고, 공개적으로 유감 표시를 하면서 화해 분위기로 돌아섰다. 이날 모임은 크롤리의 제안으로 성사됐다.

이날 또 한 명의 출연자는 조 바이든 부통령이었다. 금발의 바이든 옆에는 게이츠, 오바마 옆에는 크롤리가 앉았다. 흑백을 조화시킨 자리 배치에서부터 이날 이벤트의 목적이 명확히 드러났다. 네 사람이 시킨 맥주는 제각각이었다. 오바마는 ‘버드 라이트’, 바이든은 무알콜 맥주 ‘버클러’, 게이츠는 ‘새뮤얼 애덤스 라이트’, 크롤리는 ‘블루 문’을 마셨다. ‘맥주 정상회담(Beer Summit)’으로 불린 이날 회동은 40분간 진행됐다. 처음 40초 정도 사진 촬영을 허용하곤 공개되지 않았다.

회동 후 오바마는 “우리는 항상 통합이 분열보다 강하다고 믿어왔다”며 “이번 일을 통해 모두가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로이터 통신은 “오바마는 중재자보다는 최고 바텐터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크롤리는 “우리는 특정 현안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했다”며 “과거에 매여있기보다 미래를 논의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매우 사적이고 솔직한 대화를 나눴으며, 진심으로 생산적인 자리였다”고 말했다. 게이츠는 “이번 일이 인종 차별에 관한 두려움을 가진 미국 대중에게 보다 큰 동정심을 갖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면서도 “매일 우리를 보호해주는 경찰이 있는 사회에 산다는 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맥주 회동은 정국 분위기를 쇄신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됐다. AP통신은 “오바마가 국론 분열을 부른 인종차별 논란을 뛰어넘어 분위기를 쇄신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고 분석했다. 40분간의 회동이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 문제를 해소하진 못했지만 여론을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실제 인종차별 논란이 불거지며 오바마의 지지율은 6월 중순 61%에서 최근 54%로 하락했다. 특히 백인들의 지지율은 53%에서 46%로 미끄러지며 오바마의 개혁 정책이 동력을 잃었다.

또 한마당 소통의 장을 통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미국 시민들이 각자 마음속에 갖고 있던 불편함의 일부를 털어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 PR 전문가인 에릭 데전홀은 “백악관 회동은 일종의 연출이라 할 수 있지만 오바마는 이를 비전으로 바꿀 수 있는 재능을 가졌다”며 “사람들은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잘 짜인 연출을 좋아하기 때문에 맥주회동은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섣부른 개입으로 논란을 키웠던 오바마가 자신의 경솔함을 신속하게 인정한 뒤, 그동안 펼쳐온 ‘소통의 정치’를 통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이다.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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