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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 버전' 뉴요커에 통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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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 유니버설 발레단이 뉴욕서 공연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대단히 감성적인 무대였다. 개막 공연에서 엄재용(로미오 역)과 황혜민(줄리엣 역)의 연기가 특히 호평을 받았다.

일종의 모험이었다. 유니버설 발레단은 창단 20주년 기념 미국 순회공연 작품을 2년 전 서울에서 첫선을 보였던 '로미오와 줄리엣'(안무 올레그 비노그라도프, 음악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으로 정했다. 문훈숙 단장은 "3년 전에 선보였던 '심청' 등의 작품이 동양적이고 이색적이란 이유 등으로 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며 "이젠 다분히 서구적인 정통 발레로 정면 승부를 걸 때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8시 미국 뉴욕의 링컨센터 내 뉴욕스테이트시어터. 티셔츠를 입은 유학생들과 정장 차림의 외국인들로 로비는 북적거렸다. 모두가 한국산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려는 관객들로 2755석이 꽉 찼다. 뉴욕스테이트시어터는 뉴욕시티발레단.뉴욕시티오페라단의 상주무대.

막이 올랐고 무대는 화려했다. 생동감이 넘치는 눈부신 의상과 과감한 스케일의 입체적인 무대(무대미술 시몬 파스투크)는 압도적이었다. 마치 정교하게 계산된 오페라 무대의 미장센(연출)처럼 시각적인 호소력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무대 배경이 바뀔 때마다 객석에선 "우~와!"하는 탄성이 터졌다. "발레 무대가 이렇게 웅장할 수도 있구나"란 놀라움이었다.

그 속을 로미오(엄재용)와 줄리엣(황혜민)이 거닐었다. 1막은 다소 아쉬웠다. 눈이 부신 의상과 3㎏에 달하는 모자를 쓴 무용수들이 오히려 그 무게에 짓눌려버린 느낌이었다. 무대의 화려함에 그만 춤이 파묻히고 말았다.

2막(베로나 광장의 카니발)부터 무용수들의 몸짓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특히 로미오의 칼에 오빠를 잃은 절망감을 표현하는 줄리엣의 흐느낌은 놀라웠다. 황혜민은 지극히 감성적인 몸짓으로 '자신만의 줄리엣'을 살려냈다. 점점 고조되는 음악을 타고 충격과 슬픔을 빚어내는 2막의 줄리엣은 관객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승부수는 3막이었다. 무대는 오히려 단조로웠다. 가운데 놓인 침대와 하얗게 드리운 커튼이 전부였다. 그 속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적인 사랑을 이중주의 춤으로 연주했다.

오빠를 죽인 로미오에 대한 원망, 그럼에도 자신의 몸을 뚫고 나오는 그에 대한 사랑. 너무도 대립적인 두 감정을 황혜민은 하나의 몸짓으로 풀어냈다. 숨 죽이며 비극적 사랑에 취하던 관객들은 막이 내리자 기립박수로 답했다.

로비에서 만난 미국의 무용 평론가 버지니아 존슨(54)은 "원작 자체가 감성적인 스토리"라며 "기교보다는 감성적인 춤으로 작품을 풀어낸 것이 성공의 이유"라고 평했다. 그는 또 "'로미오와 줄리엣'은 여러 버전이 있지만 가장 아름다운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며 "단지 춤이 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고 덧붙였다. 세계적인 현대무용단 앨빈 에일리 발레스쿨의 제니스 제퍼슨 감독은 "마지막 침대 장면이 무척 감동적이었다"며 "특히 줄리엣의 감성적인 연기는 압권이었다"고 말했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미국 순회공연은 LA(6~8일)와 샌프란시스코(13~15일)로 이어진다.

뉴욕=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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