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英雄譚이 얽히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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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보라, 하늘이 열리고 단군이 내려오신다.

오색구름 영롱한 곳에 백의를 걸치시고, 풍백 (風伯).우사 (雨師).운사 (雲師) 를 거느리셨다.

영특도 하셔라, 반도 땅 만주 땅 그 넓은 터전을 3백60여 인간사 (人間事) 로 다스리시는구나. 내려다보니 불쌍도 하다, 반도에 몰리고 거기다 반쪽으로 갈린 후손들. 그 비좁은 틈에서 어찌 민족 웅비의 거친 꿈이 깊을 수 있을손가."

만약 단군을 주제로 한 영웅소설을 쓴다면 서문은 반드시 이렇게 쓰리라. 난데없이 나일강가의 람세스왕이나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를 읽는 것보단 그럴 듯할 테니까. 뜬금없기론 칭기즈칸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이 어느 땐데 정복자 얘기가 끼어드는가.

얼마전 인구에 회자 (膾炙) 된 로마인 이야기는 차라리 낫다.

공화정이 제정으로 후퇴한 역사의 씁쓸함이라도 되새길 수 있을 테니까. 그 진부한 나폴레옹 얘기도 한수 접어줄 수 있다.

혁명을 뒤엎은 자가 혁명의 아들이 된 인간사의 불가해 (不可解) 를 곱씹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실재 (實在) 하는 영웅담을 넘어 가짜로 만들어낸 판타지 영웅들까지 날뛰고 있다니…. "그러면 지금이 어느 때란 말이오. " "제1회 호암 (湖巖) 논문상 수상작인 김선남.윤창헌 두 청년 연구원의 논문이 잘 정의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적 합리성과 시민적 덕성을 갖춘 국가내 모든 국민들이 참여하는 시민사회' 가 바로 21세기의 한국사회입니다.

곧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가진 개별적인 시민들이 모여 집합체를 만들고, 이 집합체들의 자율적 활동이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사회' 란 말입니다.

비정부기구 (NGO) 들은 정부와 제도권 정당을 견제하고 '우리가' 사회변혁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지 않습니까. " "좋습니다.

미래의 한국사회가 다원 (多元) 민주정치의 사회라면 지략과 무용 (武勇) 을 바탕으로 목표달성 하나만을 위해 매진하는 영웅들이 날뛸 시대는 분명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담이 읽히는 이유를 잘 생각해 보셨습니까. " 그렇다.

거기에는 분명 무엇인가 있다.

참여 민주주의가 융성할 시점에서 왜 카리스마나 완전자의 등장을 바라는 속마음이 생길까.

"그것은 오늘의 정치가 너무 옹졸하게 돌아가기 때문일 겁니다.

요즘 정치판에선 들리느니 '진흙땅에서 싸우는 개 (泥田鬪狗의 우리말)' 소리요, 보이느니 돈받고 감옥에 가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러니 좀 더 시원하고 비전있는 정치를 바라는 마음에서 영웅담을 읽고 심리적 보상과 대상 (代償) 을 얻으려는 것이겠지요. "

"그러면 우리 정치가 왜 이리 옹졸해졌을까요. "

"정치인들의 활동무대가 옹색해졌기 때문입니다.

옹색 (壅塞) 과 옹졸은 닮은꼴입니다. 단군조선을 이은 고구려도 만주벌에서 건국의 드라마를 펼쳤지요. 훨씬 후에 벌어진 삼국통일 전쟁도 경주 - 부여 - 평양을 잇는 전 국토가 무대였고, 배후에선 대일.대중 국제외교도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정치무대는 반도의 남쪽 절반으로 줄어들지 않았습니까. "

"영웅이 나타날 때가 됐는데도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안타까움이 영웅담을 찾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분단된 국토를 통일하고 나라와 민족을 21세기 새 문명권으로 진입시키는 어려운 과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 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의 질문에는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

"영웅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국민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통일을 이루어 드넓은 정치터전을 정치인들에게 제공해 줍시다.

그리고 부지런히 노력해서 새 문명시대의 도래에 대비함으로써 좋은 정치풍토를 만들어 그들에게 선사합시다. " "?"

김성호(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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