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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갈등조장’형 언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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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말이 통하고 내가 살던 곳이기에 익숙하다는 당연한 이유 외에도 이들이 평가하는 우리의 장점은 분명히 있다. 신속한 민원 처리, 쉴 새 없이 오가는 다양한 대중교통, 맛있는 음식들, 어디서나 빠르게 접속되는 인터넷, 신속·정확한 택배, 이사하면 바로 연결되는 전화와 가스, 사고나 긴급상황에 총알같이 달려오는 자동차보험 등등이 그것이다. 아무리 선진국이라고 해도 이러한 편리함을 누리고 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막상 신문이나 TV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정쟁과 비리·비난으로 얼룩진 부정적 모습들이 신문의 1면을 뒤덮고, 격앙된 톤의 앵커가 불안을 증폭시켜 우리 사회에 대한 비관을 확대시킨다. 종일 그런 내용에 노출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불만과 분노의 기운에 오염되는지, 온통 화난 사람들 투성이다.

여야나 지역 갈등을 넘어, 빈부·좌우·노사·노노는 물론 직역이나 노소(老少) 대립 등으로 사회적 갈등이 세분화되고 치열화하여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는지 염려스럽기까지 하다. 언론의 비판적 기능을 통한 민주주의나 법치주의 추구라는 목적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부정적 학습 효과라는 사회적 부작용이 의외로 크다는 점은 좀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판사로 재직하면서 몇 차례 대학생들을 상대로 법원과 재판에 대해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강연 후 질의응답 시간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있다. 재판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가진 자의 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인데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떠하냐는 것, 사법권 독립을 유지하고 전관예우의 폐해를 막을 방법은 무엇인지 하는 것들이다. 그들이 실제 그런 경험을 해본 것도 아니고 가까이서 들은 것도 아니면서 똑같은 용어를 구사하며 기정사실화해 묻는다. 유전무죄라는 말을 거론한 사람의 신빙성이나 사실 여부는 따지지도 않고, 반복되는 보도를 통하여 익힌 부정적 단면을 일반화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모두들 쉽게도 다른 직역 사람들 전체를 부정과 비리로 매도하고, 남을 의심하며 분노를 표출하고 사회 전체에 낙담한다.

가끔 대형 참사의 비극이 빚어질 때면 피해자 가족들의 비탄에 초점이 맞춰져 연일 각 방송사의 보도가 이어진다. 가족들이 통곡하고 실신하는 적나라한 모습을 경쟁적으로 화면에 내보낸다.

반면 미국에서는 2007년 조승희의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 당시 피해자 가족들의 절제된 감정과 관계자들의 차분한 대응을 객관적 시선으로 보도해 이채로웠던 기억이 있다. 몸부림치는 절규나 관계자 문책을 요구하고 소홀한 장례 처리에 항의하는 집단민원을 비춰준 적이 없다. 한국인들이 사과 편지를 보내니 피해자 가족들은, 미국인 조승희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저지른 일인데 왜 한국인들이 미안해하고 사과해야 하느냐고 했다던 기사도 있었다. 당시 몇몇 사람과 절제된 조문문화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한자리에 있던 이는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그들도 당한 일에 대한 슬픔의 강도야 우리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고 통곡하고 절규하는 사람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 조절된 이성적 대응에 초점을 맞춰 보도함으로써 언론이 간접적으로 국민을 교육하고 사회에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라고.

우리의 사회 갈등도 갈등의 존재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도하는 태도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해결 방법이 순화되거나 반대로 불법이 증폭될 수 있다. 언제부터인지 사회의 긍정적 측면을 보도하는 것은 재미없고 ‘사실의 미화’라고 평가절하하는 세태가 되었다. 새된 소리로 불만을 표출하고 붉은 머리띠, 불끈 쥔 주먹만이 전형적 의사표현의 모습인 양 굳어졌다. 사람을 살상하는 죽창과 새총이 권력을 응징하는 무기로 등장했다. 이런 모습을 부각하는 게 비판 기능의 수행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의 장점은 짐짓 외면하고, 현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으면서 분쟁과 갈등만 집중 조명해 얻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안타깝다.

김영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