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강산기' 통해 본 한석봉 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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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이번에 처음 공개된 '유금강산기' (遊金剛山記) 는 한석봉 글씨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단정할 뿐만 아니라 부드러움과 힘까지 느껴진다는 것이다.

추사 (秋史) 김정희 (金正喜) 는 자신의 '완당집 (阮堂集)' 에서 한석봉의 글씨에 대해 "그의 글씨 중엔 지극히 높은 곳도 있고 지극히 비속한 곳도 있으니, 그 재주와 힘이 어울린 데는 산도 무너뜨리고 바다도 뒤엎을 만하다" 고 평가했다.

'유금강산기' 의 글은 당시 선비들의 금강산 유람 열기를 엿보게 한다.

당시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한석봉과 최립의 금강산 유람엔 이광준 (李光俊) 강원도 관찰사와 그의 두 아들도 동행했으며 같은 시기에 또다른 문장가인 월사 (月沙) 이정구 (李廷龜) 도 다른 방향으로 금강산을 유람하던 중이었다.

원래는 이정구까지도 한석봉과 같이 유람하기로 약속했으나 일정이 엇갈린 것으로 전해진다.

한석봉과 이정구의 우정은 석봉의 묘비명을 이정구가 지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렇듯 조선 중기에 금강산은 문인이라면 꼭 들러야 하는 '순례지' 로 자리잡았다.

이정구의 표현을 빌리면 "발 뒤꿈치가 서로 서로 이어졌다" 고 한다.

최립은 '유금강산기' 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것을 깨우쳐 줄 수 없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그것을 알릴 수 없다 (父不能以喩之於子, 子不能以致之於父)" 며 감탄을 연발한다.

아무리 친한 관계라도 금강산의 풍광과 그것을 보는 흥취는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한석봉.최립과 동행하지 못한 이호민은 '유금강산기' 에 "산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대하니 신선의 무리와 같다" 는 말로 금강산의 선계 (仙界) 를 그리워한다.

이호민의 아쉬움은 한탄에 가깝다.

그는 '꿈으로 상상하고 그리워하다 그만 머리는 눈같이 흰머리가 되어 버렸네' 라고 한숨을 내쉰다.

'유금강산기' 를 쓴 한석봉은 추사와 함께 조선시대 서체를 바꾼 거목으로 손꼽힌다.

조선 초기부터 인기를 끌었던 조맹부체가 한석봉의 등장으로 퇴조하고 왕희지체가 다시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물론 한석봉은 그 왕희지체를 나름대로 소화해 사자관체 (寫字官體) 라는 독특한 서체를 확립했다.

그의 영향은 2백년 뒤 김정희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된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한석봉의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작 등 10여점. 이중 '한석봉증유여장서첩 (韓石峯贈柳汝章書帖)' 이 보물 제1078호로 지정돼 있다.

전문가들은 '유금강산기' 의 글씨가 이 작품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고 있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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