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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서 희생된 ‘프랑스 왕세자 사기사건’ (3)

중앙일보

입력

루이 17세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비운의 왕세자다

자신이 이미 죽어 저 세상으로 간 루이 샤를, 루이 17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연달아 등장했다. 무려 50여 명이 등장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가장 신뢰성이 가는 사람이 바로 앞서 말했던 시계 수선공 논도르프다.

루이 샤를이 살아 있을 거라는 소문은 과거 왕정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감옥에 있던 샤를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탕플 감옥에서 탈출했다거나, 독살당했다는 소문, 그리고 죽은 소년은 루이 17세가 아니라 그와 닮은 대역이었다는 등 여러 소문들이 무성했다.

또 바꿔 치기 했다는 세간의 의혹에 대해 반박할 근거도 없었다. 감옥에서 죽어서 생 마르그리트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샤를이 정확하게 프랑스 왕가의 후계자인 루이 17세라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과학수사가 중요한 것은 과학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혁명가들이 수립한 공화정이 왕정으로 복귀하고, 다시 혁명가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와중에서도 샤를에 대한 소문은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어린 샤를이 죽은 후 200년 동안 그에 대한 책이 무려 500권 이상 출간될 정도로 세간의 화제가 됐다.

왕정으로 복귀한 루이 18세는 이러한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뚜렷하고 믿음을 줄 수 있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샤를의 미스터리는 점점 증폭되기만 했다.

루이 샤를 측근자들 ‘진짜’라고 인정해

루이 샤를의 누나 앙글렘 공작부인은 론드로프가 가짜라며 만나주지도 않았다.

샤를을 감시했던 군인들도 그가 과연 루이 17세인지 아닌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던 루이 16세 왕실의 자초지종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를 수밖에 없다. 또 문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그들이 감시했던 어린 소년이 샤를이라고 감히 주장도 할 수 없었다.

만약 감옥에 갇혀 있던 소년이 샤를이었다고 주장한다면 프랑스 최고의 통치자인 왕을 시해하는 데 가담했다는 커다란 반역죄를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요동쳤던 공화정에서 왕정으로 세상이 바뀐 시대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게 가장 현명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1811년에는 감옥에서 샤를에게 온갖 수모를 자행했던 앙투안 시몽의 아내라는 여인이 나타났다. 당시 78세의 이 여인은 이름이 마리 시몽으로 감옥에 있다가 죽은 소년이 샤를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샤를의 미스터리를 증폭시키는 데 불을 지폈다. 이 여인은 당시 구제불능으로 판정 받아 정신병원에 감금돼 있었다. 그녀는 심지어 샤를이 어떻게 탈출했는지에 대해서도 소상히 이야기했다.

그녀가 왜 정신병원에 감금됐을까? 혹시 샤를을 학대한 죄책감에 시달린 것은 아닐까? 또 프랑스 정부가 골치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것은 아닐까? 문제를 확대 해석하면 끝이 없는 법이다.

마리 시몽의 진술에 따르면 샤를은 빨래 바구니에 들어가서 감옥을 빠져 나갔다. 대신 샤를과 거의 비슷한 나이의 소년이 대신 감옥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녀는 하늘에 맹서를 걸고 자신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샤를이 11년 전에 병원으로 면회까지 와서 “감옥에서 잘 돌봐주어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술이 명확하지 못했다. 그녀는 법정에 나서지도 못했고 증거로 채택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샤를에 대한 소문과 의혹만 무성하게 만들었다.

샤를의 심장을 훔친 부검 의사도 모른다고 대답

샤를이 죽었을 때 부검을 한 의사 펠레탕(Pelletan)도 죽은 소년이 샤를인지 아닌지 모른다고 말했다. 사실 그가 부검한 사람은 10세의 어린 소년이지 그가 프랑스 브르봉 왕조를 이어나갈 왕손인지 알 길이 없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이 의사가 바로 ‘루이 16세 미스터리’를 푸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당시 이름도 전혀 없었던 펠레탕은 어린 샤를을 부검하면서 기념으로 샤를의 심장을 도려내 집으로 갖고 왔다.

대혁명으로 프랑스 왕가가 몰락하지 않았다면 루이 17세인 샤를을 면전에서라도 볼 수 있었을까? 그래서 그는 공명심에서 샤를의 심장을 손수건에 싸서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좋게 이야기 하자면 훗날의 역사를 생각해서 그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펠레탕이 샤를의 심장을 훔친 것은 심장이 나중에 커다란 값어치가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의 심장이 내 손 안에 있소이다.”라며 남들한테 뻐기고 자랑하려는 공명심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어쨌든 ‘루이 17세 미스터리’를 증폭시키는 주장들이 많이 등장했다. 내용을 보면 다시 복고된 왕정으로부터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샤를과 관계가 없다는 주장들이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논도르프, 궁정생활과 감옥생활 생생하게 전해

‘루이 17세 미스터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파란만장한 샤를의 심장 이야기는 잠깐 뒤로 미루고 자신이 루이 17세라고 당당하게 주장한 논도르포의 사기행각으로 넘어가자.

독일 출신인 그는 프랑스어도 잘했다. 사람들은 논도르프도 다른 사람들처럼 사기꾼일 것이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믿음을 주는 내용들이 너무 많이 나왔다.

우선 그는 죽은 샤를과 모습이 비슷했다. 백신접종으로 팔에 생긴 삼각형의 흉터, 어릴 때 사고로 윗입술에 난 흉터, 그리고 앞으로 튀어나온 치아를 비롯해 샤를에게만 있던 신체적 특장들을 꼭 같이 간직하고 있었다.

또 어렸을 때 일화들이 영락없는 루이 샤를이었다. 그가 들려주는 궁정에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너무나 생생하고 사실적이었다. 그래서 의문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점차 그를 믿기 시작했다. 더구나 샤를과 궁정생활을 같이 했던 인물들이 논도르프를 샤를이라고 인정했다. (계속)

김형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