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미술, 권력의 치마폭서 벗어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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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미술의 불복종
김정락 지음
서해문집, 288쪽
1만2900원

말랑말랑한 안내서를 원한다면 이 책은 덮는 것이 낫다. 심상치 않은 제목만큼 책에서는 사회서나 역사서의 느낌이 물씬 풍겨 나온다. 미술사학자인 지은이는 권력과 미술이 맺어온 역사적 관계에 주목한다. “미술은 권력에 대해 창녀”라는 미술사학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미술은 권력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중세에는 종교와 정치 권력에, 근대 산업 혁명 시기를 거치면서는 경제 권력에 종속된 것이 미술의 ‘비극적 운명’이었다.

이 비극적 운명은 예술의 태생적 한계에 기인한다. 지은이는 “예술은 잉여 생산에 따른 경제적 여유가 낳은 사치품이며 이런 사치는 소수의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로 인식됐다”고 설명한다. 그는 미술 또한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가진 이들에 의해 주문·소비되고 수집된 탓에 미술 사조의 흐름은 지배계급 취미의 변천사라고 잘라 말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미술은 권력에 기생해 이어져 왔다”며 “모든 시각적 생산물은 당대의 권력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됐다”고 말한다.

초상화는 권력의 상징 그 자체다. 초상화 대부분이 권력자의 권위를 드높이려는 공식적인 이유로 제작된 까닭에 등장인물들은 초월적인 존재로 그려졌다. 지은이는 “인간의 신격화는 권력의 종교화를 가져왔고, 권력자의 초상은 전제정치에서 만들어진 미술 형식들이 시대에 맞게 조율됐다”고 강조한다.

권력이 전복된 후 새로운 집권자가 이전 권력자의 초상을 파괴하는 의식은 종종 일어난다. 사진은 이라크 점령 후 미군들이 사담 후세인상을 철거하는 모습. [서해문집 제공]

이처럼 미술이 권력의 시녀가 되다 보니 ‘미술작품=권력’이란 등식이 성립돼 사회적·정치적 목적으로 미술 작품을 파괴하는 행위도 나타났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은 파라오에 대한 증오와 단죄를 표현하기 위해 기념 조상이나 벽화를 파괴했고 로마에서도 비문 등에 새겨진 황제의 이름을 도려내는 ‘기억의 말소’라는 형벌이 있었다. 프랑스대혁명 때도 절대 왕권에 분노한 민중은 왕궁의 조각과 초상화를 파괴했다.

그럼에도 미술이 늘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니다. 스페인의 궁정화가이던 프란시스 드 고야는 고통스러운 민중의 삶을 외면하지 않고 ‘카프리초스’ 판화 시리즈와 ‘전쟁의 참화’라는 연작 판화를 남겼다. 중국 문화개혁의 선구자인 작가 루쉰은 제자와 함께 국가의 위선과 기만을 폭로하는 목판화를 제작해 정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저자는 미술을 인간이 만들어 낸 최고의 생산물이라고 강조한다. 문화재적 중요성 때문이 아닌 미술이 지닌 메시지와 표현 방식의 탁월함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권력자의 입맛에 맞춘 미술을 경계하는 지은이는 미술이 서 있어야 할 지점에 대한 대답을 이 문장으로 대신했다. “미술의 가치는 미술이 스스로 존재하기 위한 반항과 불복종에서 시작된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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