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비상경제체제로 나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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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미 15개월째로 접어든 아시아의 경제위기는 조금도 해결의 조짐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 위기가 러시아와 중남미 등 여타 후진국들로 확산되며 정치.사회적 혼란까지 수반하는 복합적 환란 (患亂) 으로 변질돼 가고 있다.

후진국들의 경제위기는 점점 더 심화돼 가는데, 국제통화기금 (IMF) 은 그동안 아시아 위기로 가용자금이 거의 탕진되고 미국 의회의 반대로 45%쿼터 인상도 보류되고 있어 현재 우리나라 외환보유고의 4분의1도 안되는 1백억달러 정도의 여유자금밖에 없어 어느새 '종이 호랑이' 로 변했다.

앞으로 브라질.베네수엘라같은 중남미 국가들이나 말레이시아.남아프리카 등 여타 후진국들이 IMF에 구조요청을 해와도 더 빌려줄 돈이 없기 때문에 이들은 러시아 식으로 외채 모라토리엄 (지불유예) 을 선포할 가능성이 커졌다.

IMF의 무력화 (無力化) 로 후진국에 대한 투자 위험성이 훨씬 높아지자 선진국 투자가들은 서둘러 자금회수를 강행하고 있어 후진국 주식값은 폭락하고 해외 기채 (起債) 비용은 상대적으로 급등했다.

"일이 안될 가능성이 있으면 반드시 안되는 방향으로 꼬이게 마련" 이라는 소위 '머피의 법칙' 이 예견하듯 세계경제의 환란은 갈수록 악화만 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경우도 경제난국이 개선되기보다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올해초까지만 해도 정부와 IMF는 올해 국내총생산 (GDP) 이 1% 성장하고 재정적자는 GDP의 0.8%로 예측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상반기 GDP성장률은 - 5.3%, 2분기는 - 6.6%를 기록했으며, 세수 부진에다 실업대책 재원 마련으로 올해 재정적자는 GDP의 5%에 육박하는 18조5천억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제조업계 가동률은 60%, 실업률은 이미 8%에 육박하고 있으며 수출은 지난 5월 이후 4개월동안 연속 마이너스로 돌아섰으며 그 감소추세는 최근 두자리 숫자에 이르는 등 더욱 심화되고 있다.

왜 오늘날 우리나라 경제난국에 머피의 법칙이 작용되고 있는가.

그 주된 이유는 정부 경제정책 당국자와 실물경제를 다루는 민간업계 사이에 지금의 경제위기를 보는 시각차이가 너무도 크기 때문이라고 본다.

업계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관찰해보면 분명히 엄살 아닌 익사 직전의 비상사태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치권과 정부당국자들은 업계가 체감하고 있는 절실한 위기의식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지금 우리 경제가 당하고 있는 위기의 심각성은 실로 과장하지 않고 북한의 탱크가 안 구르고 총알만 안 날뿐 6.25전쟁에 버금가는 초비상 사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러다간 우리나라 산업기반 자체가 주저앉아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경제 비상사태의 주원인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혈액인 돈이 안 돌아가기 때문이다.

은행.종합금융.보험 등 모든 금융기관들의 구조적 취약과 주식.채권시장의 빈사상태로 5대그룹을 제외한 한국의 모든 기업들이 미증유의 자금압박을 받고 있다.

정부는 지금 당장 이 자금의 물꼬를 터주어야 한다.

지금같은 경제 비상시국에 재정적자 억제니, 건전금융 추구니 하는 한가하고 시시콜콜한 경제이론은 집어치우고 우선 우리 기업들부터 살려놓아야 한다.

30년대 경제불황이 세계경제공황으로 악화됐던 주이유가 영.미 등 선진국들의 19세기 금본위제도에의 집착이었던 점을 교훈삼아, 지금같은 경제 비상시국에는 한가한 경제이론은 접어두고 응급수술로 우선 환자부터 살려놓고 봐야 한다는 각오로 행동해야 한다.

30년대 초 미국의 GDP가 3년동안 30%나 폭락하는데도 후버 대통령은 당대 (當代) 의 경제논리에 포로가 돼 재정적자를 줄인다고 세율인상을 하고 달러 환율을 방어한다고 관세를 대폭 인상시켜 경제공황을 부추긴 결과로 후세에 영원한 웃음거리가 돼버린 교훈을 우리는 지금 명심해야 한다.

지금같은 경제 비상시국에서는 앞뒤 따질 것 없이 우선 자금줄의 물꼬를 트기 위해 총력을 집중해야 한다.

그러자면 하루 속히 빈사상태에 빠진 금융권을 과감한 개혁과 대담한 자금수혈로 정상궤도에 올려 놓아야 하며 채권시장도 빨리 정상화시켜 5대그룹 이외의 회사들도 사채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금융경색을 해결해야만 기업도 살고 경제회복의 희망이 있을 것이다.

박윤식(미국 조지워싱턴대 교수.국제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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