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아파트 옆 벼농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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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쁜 일손을 멈추고 논두렁에서 먹는 새참이 반가운 것은 서울 농사꾼도 마찬가지. 장흥연(左).송영옥씨 부부가 땡볕 더위를 잠시 잊었다.

서울 아파트에 살면서 차 몰고 서울 논으로 출근하는 농사꾼을 만났다.

김포공항 뒤편의 서울 강서구 과해동.개화동.발산동 일대. 분명 서울이건만 그곳은 온통 푸른 벼가 들어찬 논이다. 공항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모습과 저 멀리 아파트 단지가 부조화스럽다.

여기서 500여 가구가 농사를 짓는다. 방화동 아파트에 사는 장홍연(54)씨처럼 대부분 서울에 집이 있다. 출퇴근 농부인 장씨는 "그렇지만 해 뜰 때 나와 해질녘에 들어가고, 겨울이면 심심한 것은 시골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곳의 논 면적은 여의도의 두배 가까운 170여만평. 서울 전체 논의 90%를 차지하는, 수도 최대의 곡창 지대다. 2002년 선보인 '경복궁 쌀'의 산지이기도 하다. 서울의 나머지 논은 서초구에 약간 있다. 좀 과장해 '곡창'이라 했지만 실은 경기나 호남 등지에 댈 수 없는 '텃논'수준이다. 지난해 소출이 쌀 32만여가마로 서울시민이 하루 먹는 양 정도다.

논이라 해도 서울이라 땅값은 만만찮다. 평당 가격이 최저 30만원이고 최고 100만원인 곳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 농부들은 대부분 '소작인'이다. "순전히 벼농사로 먹고살려면 수천평은 있어야 하는데, 그거 살 돈 있으면 농사 짓겠느냐"는 게 이곳 농부들의 당연한(?) 반문이다.

논을 빌리는 대가는 200평당 쌀 한가마니가 보통. 이 지역은 농경지로만 쓰게 돼 있어 땅 주인들도 농사꾼에게만 빌려주고 있다.

농사 비용은 진짜 농촌보다 좀 덜 든다. 농약을 농협.강서구청.서울시농업기술센터에서 공짜로 주기 때문이다. 농약을 마구 뿌려 환경을 망치는 것을 막으려고 일년에 네차례 비행기를 동원해 대신 농약을 뿌려준다.

농사 짓는 돈이 덜 든다고 소득이 서울 밖 농촌보다 크게 나은 것은 아니다. 5만평을 빌려 농사를 짓는 장씨가 아직 아파트에 월세 사는 정도다. 수천평 농사가 보통이고, 장씨 같이 5만평지기라면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규모인데도 그랬다. 수해에 약한 지역이어서 별로 남는 게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장씨는 '억대 임차농'을 꿈꾸고 있다. 도로보다 1m 이상 낮아 비가 오면 물이 쏟아져 내렸던 논을 서울시 등에서 돋워 주고, 또 경인 운하의 일부를 건설하면서 최근 관개 시설을 정비해 '내 돈 안 들이고' 수해 걱정을 거의 덜었다.

"잘 하면 5만평에서 1000가마는 나올 거요. 그 중 500가마는 논 임대료와 농사 비용이고 500가마가 내 거지. 가마당 20만원이니까…."

계산하면 '1억원'. 장씨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내기 쑥스러운 듯 "몇 천만원은 벌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수해 염려가 크게 주는 등 여건이 좋아지자 이곳에서 농사 지을 수 없겠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농지가 제한돼 더 이상 받아들이기는 힘든 현실이다.

특산인 '경복궁 쌀'은 조건이 까다로워 500여 농가 중 10여 가구만 생산한다. 네차례 항공 방제 말고는 농약을 쓰지 않고, 화학비료보다 퇴비를 많이 줘야 하며, 품종은 추청(아키바레)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기 때문이다.

밥맛을 좋게 하려고 택배 주문(011-723-7439)을 받은 뒤에야 방아를 찧는 것도 특징이다. 대형 할인점에 내보낼 만큼 대량 생산이 안 돼 택배로만 판매(20㎏에 5만원)한다.

'경복궁 쌀'이란 이름은 농민들과 서울시농업기술센터가 머리를 맞대고 붙였다. '마포나루 쌀' '한강 쌀' 등도 후보였다. 농업기술센터 강대경(45) 벼농사 담당은 "그 중에 '임금님께서 잡수시던 귀한 쌀'이란 느낌이 든다는 점에서 '경복궁 쌀'로 낙점한 것"이라고 말했다.

풍광은 영락없는 시골인데 인심은? 신문에 싣고자 장홍연씨 부부가 논두렁에 앉아서 새참 먹는 사진을 찍을 때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주태일(45)씨가 끼어들었다. 그도 농사를 짓는, 장씨의 '직장 이웃'. 사진 찍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씨 부부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잠시 사라졌던 주씨는 검은 비닐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손님인데 이거라도…"라며 그가 내민 봉투에는 두유와 오렌지 주스 등이 들어 있었다.

글=권혁주 기자<woongj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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