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용산 - 양색시 대신 반미 시위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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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반미 시위대와 전경들만 정문 앞에서 맞서죠. 1980년대만 해도 양색시들이 진을 쳤어요. 어떻게든 부대 안 클럽에 들어가려고…."


용산 미군 기지 앞의 저 항아리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45년 전 타이피스트로 용산 미군기지 근무를 시작, 11월 은퇴를 앞두고 있는 한경숙(67)주한미군사령부 행정보좌관. 꽃다운 처녀에서 손자를 둘 본 할머니가 될 때까지 그녀의 일생은 용산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다. 49년 함경도에서 가족과 함께 월남한 뒤 용산구에 정착, 줄곧 원효로에서 살았다. 도심과 가깝고 강과 맞닿아 있어 용산은 외국 군대의 단골 주둔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보급기지였고 1882년 임오군란 땐 청군의 주둔지가 됐다. 일제는 1905년 주변 땅을 강제 수용, 영구적 군사기지를 완성했고 해방 후 유엔군.주한미군사령부가 들어서면서 점차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한국전쟁 때 피난갔다 돌아온 한씨는 동네 담벼락에 붙은 전단을 보고 미군부대에 지원했다. 당시 첫 월급이 일반 기업 부장급 수준이었다. 어렵게 붙었지만 주위에 떳떳이 알리지도 못했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미군부대에서 일한다면 거의 양색시 취급을 받았어요."

그간 한씨가 느낀 가장 큰 변화는 '한국에 대한 미군의 인식'이다. 20년 전만 해도 퇴근할 때 항상 헌병들의 몸수색을 받아야 했다. 미제 물건의 밀반출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사무실에 오면 동료 '서전(하사관)'들이 맛보라며 오렌지 등을 갖다 주기도 했다.

"이젠 오히려 미군들이 전자상가에 데려가 달라고 조를 정도니까. 얼마 전 초등학교 다니는 손자에게 미제 연필 몇자루 갖다줬더니 쳐다보지도 않더라고."

넓은 잔디에 아담한 단층건물, 영화에서나 볼 법한 외제 차들. 분명 이곳은 근대화를 서두르던 담장 밖과는 다른, 선망의 땅이었다. 그래서 70, 80년대 일반에 부대를 공개하는 '오픈 하우스' 행사날이면 용산 일대가 들썩거렸다. 미아가 수십명 생길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다.

해외 로케가 힘들 때여서 영화 촬영지로도 각광받았다. 주한미군사령부 김영규(59)공보관은 "90년대 초 인기그룹 '듀스'의 초기 뮤직비디오도 사실 여기서 찍은 것"이라고 귀띔했다.

머지않아 평택으로 옮길 미군기지 활용안을 두고 논란이 많지만 모두 공원이 된다면 뉴욕 센트럴 파크나 런던 하이드파크 못지않은 명소가 된다. 아직도 열강의 수레바퀴 자국이 온몸에 남아있는 용산이 개발에 지친 서울을 쓰다듬어 줄 초록 공간으로의 변신을 꿈꾸고 있다.

김필규 기자<phil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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