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몸살앓는 일본경제]하.외자공세에 속수무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미국 메릴린치증권이 도산한 야마이치증권 점포를 인수, 문을 연 도쿄 (東京) 오테마치 (大手町) 의 메릴린치 일본지점. "인생설계에 최적의 모든 금융상품을 판매한다" 는 이 점포에는 지난 7월 개점 이후 오후 3시 문을 닫을 때까지 상담실이 빈 경우가 없다.

같은 날 문을 연 바로 옆의 다이와증권 오테마치지점이 하루 한두명의 고객 유치에 쩔쩔매는 것과 딴판이다.

외국인 밀집지역인 도쿄의 히로 (廣尾) .외국인 전용 아파트를 끼고 있는 이 일대의 백화점들은 올 상반기 매출이 오히려 늘어났다.

외국인 임대주택 전문인 레오 코퍼레이션은 "맨션임대료가 전년대비 평균 20%가량 하락했지만 히로.미타 (三田) 등 서양인 거주지역의 임대료는 떨어지지 않고 있다" 고 말했다.

불황의 일본에 외국자본이 밀려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엔화약세 이후 지난 9개월 동안 외국계 금융기관이 사들인 일본의 불량채권은 4조엔어치. 메릴린치증권은 사쿠라은행.산와은행으로부터 1조엔의 불량담보채권을 사들였고 골드먼 삭스는 도쿄미쓰비시은행과 대형 보험사로부터 8천억엔어치의 불량채권을 매입했다.

일본 예금자들의 움직임은 더 민감하다.

시티은행은 엔환율이 급변동한 지난 6월 16일 단 하룻동안 "24시간 전화서비스를 통해 6만건의 신규계약을 유치했다" 고 밝혔다.

일본 금융기관에 맡기면 연간 0.3%의 이자를 건지지만 외국계 금융기관의 외화표시 예금에 가입할 경우 환전 수수료를 제하고도 연간 4%정도의 이자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량채권에 짓눌려 속수무책인 일본금융기관들에 외국계 금융기관은 한편으론 구세주다.

메릴린치증권이 야마이치증권의 사원과 점포를 30%가량 인수했고 미국의 GE캐피털은 도호 (東邦) 생명의 직원 7천명과 영업조직을 물려받아 새로운 보험회사를 설립했다.

닛코 (日興) 증권은 미국 트래블러스그룹의 자본참여로 기사회생했다.

일본 주요 금융기관들은 특히 새로운 금융기법이 필요한 투자신탁 분야에는 거의 대부분 외국기관과 제휴했다.

그러나 외국자본이 내거는 합작조건은 가혹하다.

닛코증권 관계자는 "25%의 자본참여를 조건으로 12월까지 트래블러스그룹 산하의 샐러먼 스미스 바니증권과 합작 자회사를 설립해 모든 법인분야 영업을 넘기기로 했다" 고 말했다.

한마디로 알짜배기 영업은 트래블러스그룹이 경영권을 장악한 자회사에 넘기고 닛코증권에는 일반고객을 상대로한 껍데기 장사만 남게 되는 셈이다.

프리마크 데존사의 수석연구원 피엘 에리스는 "현재 미국 금융기관이 취급하는 금융상품은 3천종류가 넘는 반면 일본 금융기관들은 1백종류에 불과하다" 며 "금융업도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신상품을 제때 개발하지 못하면 도태하게 마련" 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은 제조업을 통해 외화를 긁어들이지만 우리는 금융을 통해 몇배 이상을 되찾을 수 있다" 는 국제 투기가 조지 소로스의 예언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도쿄 = 이철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