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美작가 미라 스타우트 장편'천그루의 밤나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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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한국의 역사와 혼은 서양인에게 어떻게 비칠까? 아니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애써 등지고 낯선 공간에서 살다 문득 피붙이를 그리는 심경으로 둘러본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한국계 미국인 여성작가 미라 스타우트의 장편 '천 그루의 밤나무' (문학세계.상, 하) 는 서양인과 우리 핏줄이 교차하는 그런 미묘한 시각에서 우리 민족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화가인 아일랜드계 아버지와 바이얼리니스트인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196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스타우트는 지난해 영국에서 이 작품으로 데뷔와 함께 7만여부를 팔아 단번에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들어갔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은자 (隱者) 의 나라 한국에 독특한 개성과 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해주었다" 는 찬사와 함께 네덜란드에서도 출간됐고 독일에서도 곧 나와 광범위한 서양 독자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혼을 알리게 된다.

예술가의 핏줄, 그리고 한국과 아일랜드인의 섬세하고 환상적인 기질을 이어받은 작가답게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는 우선 아득하고 아늑하다.

크게 세부분으로 나뉜 이 작품의 첫번째는 작가의 분신인 주인공 안나의 미국 생활. 분초를 다투는 직업적 일상과 거기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관계 역시 의미 없음에 절망한다.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독. 그 사람도 나처럼 이렇게 고민하지 않을까?어쩌면 이것이 자아도취적이고 분열적인 세기의 마지막에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뉴욕에서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의 방식인지 모른다. "

이런 세기말적 절망과 고독에 대한 구원은 절제의 미덕을 보였던 어머니의 마음, 자신의 반 핏줄임을 애써 부정했던 한국의 혼에 있음을 깨닫고 안나는 한국행을 결심한다.

작품 중간에 이르러 화자는 주인공의 어머니와 외할아버지로 바뀌며 그들이 살아낸 강원도 최대 지주로서의 가문의 영광과 일제하, 6.25등 역사를 말하게 한다.

3.1운동때 애 업은 아낙과 그 애까지 도륙하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해가며 자신을 돌보지않고 민족의 대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한국의 혼을 오늘 서구인의 에고이즘과 대비 시키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안나는 설악산 꼭대기에 외증조 할아버지가 절을 짓고 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어 둘러싸았다는 얘기가 전해져온 봉정암에 오른다.

"비록 5월의 그날, 천 그루의 밤나무는 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 나무들이 실재로 존재하며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먼 훗날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 나뭇잎들이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살랑거릴 것이며… 내 영혼을 멀리 하늘로 인도해줄 것임을 나는 믿는다.

"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은 드러내지 않고 드러나지 않지만 깊숙이 존재하는 절제와 은둔의 미덕이 세기말 인류의 상실감을 구제할 것이란 믿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민족의 혼을 얼마나 등한시 했던가.

우리 반쪽 출신의 젊은 서양여자가 그 정신을 서양에 그윽하게 알리고 다시 우리에게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기말의 정신적 공황을 우리 민족의 혼이 치유해주리라는 희망까지 던지고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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