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북한탐험]1.평양의 첫날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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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꿈이었다. 조국의 절반인 휴전선 이북의 땅 여기저기를 실컷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꿈속의 사람이었다.

평양 교외의 순화강 갈래를 두고 그 양켠으로 용케 설계된 순안비행장 활주로에 내려서 시내로 들어갈 때부터 내내 그랬던 것이다.

분단 50년 이상의 그 모진 세월은 하나의 삼엄한 현실조차 쉽사리 현실로 돌려주지 못하는 회포에 잠기게 했다. 그렇게 나는 평양에 발디딘 것이다.

그 동안 한반도 전도 (全圖) 를 펼칠 때마다 다행히도 그 지도에 북한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오래 우리는 그 지역 없이도 남한으로만 삶을 지탱해 왔고 식민지의 흔적과 전후의 잿더미에서 현대사의 벅찬 일들을 펼쳐왔다.

어느덧 우리 모두의 정서는 남한의 정서였으며 그것은 이른바 분단시대의 사고틀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실인즉 북한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왔고 얼마든지 삶과 문화의 영욕을 누리다가 죽어간 것이 그 동안의 시간이기도 했다.

휴전선이 있기 전과 똑같이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는 아이들이 열심히 태어났으며 그들은 어느 새 저 6.25 남북전쟁 세대의 아픈 기억들이 없는 다른 세대의 일상에 길들어 있다.

나는 몇 해 전 처음으로 건강진단을 해보았다. 그 때 내 왼쪽 폐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폐결핵 3기를 다 앓고 나서 화석이 된 사실을 알았다.

폐병에 대한 이렇다 할 자각증상도 모르고 그 병이 어영부영 끝난 것도 모른 채 그 동안 내 몸은 세상에 내던져져 한쪽 폐의 기능 만으로 잘도 살아온 것이다.

마치 분단의 어느 한 쪽이든 다른 쪽 없이 지속되는 것처럼. 민족이나 오랜 단일생활권의 강토를 내장공동체 (內臟共同體) 이론으로 말하면 그것의 분단은 둘로 나누어진 상태가 아니라 죽음이 된다.

그럼에도 내가 폐 하나로 아직 염치없이 살아있듯이 분단으로서의 남과 북은 그것이 적대적 공생관계든 무엇이든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두 체제로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분단은 영원토록 분단이겠는가. 벌써 한국의 외환위기나 북한의 재해 난국이 그들 자신만의 문제인지 아닌지에 대한 한반도 전체로서의 성찰이 있어 마땅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 흔들리는 분단체제로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아온 삶이 더 이상의 것이 되기 위한 절반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는지도 모른다.

나는 거대한 수묵화같은 녹색으로 뒤덮인 평양의 한 강기슭 호텔 9층 객실에서 첫날밤을 보내면서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밤은 잠자고 말기에는 아주 억울한 영상적 (映像的) 인 시간이었다.

짓다가 만 1백5층짜리 유경호텔 꼭대기 위에 떠있는 별들은 간신히 걷힌 구름장 위에 마치 이제 막 태어난 것 같은 아기의 세찬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별들이 문득 울음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의 형 이영희교수는 80년대 말 버클리 시절 뉴욕 타임스 과학란에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특집기사를 읽었다. 미국 민간위성공사의 기사와 광고였다.

크기 10m의 지형이나 물체라면 지구상 어느 곳이든, 어떤 것이든, 움직이는 것도, 고정된 것도 다 인공위성으로 촬영해 판매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사진값은 2백달러였다. 그는 즉각 그 회사에 돈과 함께 편지를 보냈다.

"민족분단으로 반세기동안 가까이 보지 못한 고향의 모습을 보고 싶소이다." 압록강 하류 평안북도 삭주땅 한 마을 코드에 표시를 해보낸 고향마을의 사진을 그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이교수 뿐이겠는가. 고향을 떠나온 1천만 이산가족의 두고 온 여한은 유난히도 고향을 노래해온 민족이기에 휴전선 반세기에 이르는 동안 민족의 가장 큰 비극중 하나다.

38선 시절과 1.4후퇴 시절의 피난행렬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남에서 북으로 간 사람들의 남모르는 망향은 또 얼마나 간절한 것이런가. 이렇듯이 우리는 아직도 더 울어야할 울음으로 존재한다.

평양의 밤은 나 자신의 선택된 방문에 대한 과분과 내가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만감을 대행할 의무가 어우러진 착잡한 감명 (感銘) 으로 채워졌다.

또한 이제까지 만날 수 없었던 그 곳의 산천초목과 그 동안의 간고한 삶을 잘 견뎌온 동포의 지방질 없는 얼굴들과의 정다운 대화를 앞두고 가슴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30여년 전 나는 시 '콜레라' 를 썼다. 남한의 내가 콜레라균이 되어 휴전선 가시철망을 넘어 북한의 한 여인 몸에 들어가 콜레라로 함께 죽어 흙이 돼버리자는 절망적인 역설의 내용이었다.

그런 시 저쪽이 오늘에 달려와서 나는 밤 10시만 되면 만수대 동상의 불빛 말고는 다 꺼지는 그 밝지 않은 불빛 없이 북한의 밤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 어둠은 어쩌면 지난 날에 대한 사려깊은 무덤이기도 했고 내일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아무리 분단 절대의 시대였을지라도 이제 역사발전의 정 (正) 과 부 (否) 기능은 더 이상 오랜 정체에 묻혀 있을 수 없다.

변화는 현대사 속의 한반도에서 가장 절실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북한의 초대작 영화 '이름 없는 영웅' 시리즈가 10년도 넘게 이어지고 영화 '사랑의 노래' 가 80년 제작인데 오늘날에도 어제 본 영화처럼 현재화되는 사회에서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것이 태동하는 듯한 전조 (前兆) 를 반영하고 있다.

왕도 4천년. 고조선시대.고구려시대의 유서깊은 도읍이었던 그 까마득한 영광은 오늘의 평양을 '조선의 심장 평양' 이라는 구호도시가 이어받은 것으로 자임하고 있기도 하다.

평양 혹은 북한의 역사적 명분은 항일 이래의 고구려 기상에 90년대부터 더해진 단군시대의 근원성을 합한 신화와 역사의 혼합으로 강조되는 것 같다.

1.4후퇴 당시 온통 흰옷 투성이의 피난민들이 대동강 철교를 건널 당시의 사진은 우리에게 낯익다.

그 곳 동포들이 국군장교 선우휘 (鮮于煇) 들의 유도로 그 혼잡을 이겨낸 남하광경은 이제 역사의 한 단계 저쪽으로 건너갔다.

그 때의 단 하나 밖에 없던 철교 대신 지금은 '충성의 다리' '양각다리' '대동다리' '옥류다리' '능라다리' '청류다리' 들이 출퇴근 때나 집체동원 때의 인파의 구약 (舊約) 시대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세월은 모든 것 위에 있는가.

글 = 고 은 (시인.경기대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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