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용택장관은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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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천용택 국방장관은 예비역 육군중장이다.

육사 (16기) 를 졸업하고 그 어렵다는 별을 세개까지 달아봤으니 보기에 따라서는 '잘 나갔다' 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렇지 못하다.

막차로 진급해 동기생 후임을 맡았었고, 동기생 밑에서 일하는 경우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했던 그다.

千장관 본인은 언급하지 않지만 주변에서 그같은 이유를 '비영남 (호남)' '비하나회' 등으로 설명한다.

어떤 이는 병과 (兵科) 조차 보병이 아닌 포병이라는 점을 곁들이기도 한다.

이와 관련, 千장관은 그저 "자기 나름의 분야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보다 직위가 그럴듯한 사람이 더 대접받는 풍토가 문제다" 는 말로 30년 군생활동안 느꼈던 심경을 대신한다.

그는 79년 연대장이 됐다.

하나회가 전면에 떠오르던 무렵이다.

육사 16기인 千장관의 앞뒤에는 이진삼 (李鎭三.15기).고명승 (高明昇.15기). 이필섭 (李弼燮.16기). 김진영 (金振永.17기) 씨 등 쟁쟁한 하나회 선후배와 동기들이 버티고 있었다.

千장관은 인터뷰에서 "12.12 전까지만 해도 하나회가 있는지 몰랐다" 고 밝혔다.

제대로 진급하고 보직받을 싹조차 없었다는 말도 된다.

이런 그가 별을 달고, 사단장이 된 것만도 대단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전략부문의 전문성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승진했고 85년 12사단장으로 나갔다.

물론 동기중 막차를 탄 것이다.

89년에는 3성장군이 돼 2군단장이 됐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정권의 정치적 배려에 의한 성격이 짙다.

육군본부 민심참모부장으로 있으면서 전역을 생각할 때 당시 평민당은 장성인사에서의 호남 푸대접을 외쳤고, 千장관이 군단장이 되는 확실한 힘이 됐다.

이런 그가 국방장관으로 군에 복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DJ정부와 국방분야의 '서먹함' 을 빗대 '초대' 국방장관이라고도 부르지만 어쨌든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강력한 국방개혁 추진을 요구하고 그 자신이 여기에 매달리는 것도 우연이 아닌 듯하다.

하나회 동기들이 보안사. 수방사. 수도기계화사령부 등으로 잘 나갈 때 육본 체계분석국장. 합참 전략기획본부장 등 다소 비켜난 자리에서 무기구입.군조직 개편. 전략수립 등을 다룬 게 많은 도움이 됐다는 얘기다.

자신의 쓰라린 경험 때문인지 승진.보직인사 때 '줄' 을 대려는 장교들은 우선 제쳐둔다.

千장관은 하나회 문제를 묻자 "사조직이 생긴다면 형사처벌까지 해 옷을 벗기겠다" 며 사조직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비췄다.

하지만 그가 취임 후 처음 주관한 지난 4월 장성진급 인사에선 하나회 출신 2명이 소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하나회원 중엔 선배들이 들라고 해 본의 아니게 가입한 사람도 있다" 며 "출중하고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차별없이 기회를 줄 것" 이라고 했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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