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의 그린수기]13.촌티 풀풀났던 여중생 데뷔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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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US여자오픈 때부터 동행하고 있는 아버지는 요즘 신이 나셨다.

나와 함께 밖에 나가면 사인을 요구받을 정도로 어느덧 유명인사가 됐다.

아버지는 멋쩍어 하면서도 싫지는 않은 표정이다.

그 표정 속엔 나와 함께 고생한 시절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지난 9일 제이미 파 크로거대회 1라운드가 끝나고 한 교민 집에 초대돼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차 안에서 울어버렸다.

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드리시며 "아직 멀었다. 세리야" 하며 말끝을 흐리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처음 골프대회에 출전한 것은 중학교 2년 때였다.

경기도 기흥의 골드골프장에서 열렸던 골프다이제스트배 주니어대회. 나의 공식 데뷔전이었다.

당시 연습이라고는 연습장에서 두 세 달 한 것이 전부였다.

라운드는 일곱번밖에 하지 못한 상태였다. 골프채도 변변한 것이 없어 아버지가 쓰던 낡은 것을 들고 나갔다.

아버지는 경험 삼아 다녀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개인사정으로 동행하지 못하고 서상기씨가 나를 데리고 갔다.

그때 내 모습이 얼마나 촌스럽게 보였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남들은 다 개인코치와 최신형 골프클럽을 갖고 있었고 부모들의 성원도 내 기를 꺾어놓는데 한 몫 했다.

나는 아는 사람도 없이 낡은 골프채 하나만 달랑 메고 왔으니…. 오기가 생겼다.

성적은 1라운드 89타, 2라운드 83타, 합계 1백72타로 여중부 3위를 차지했다. 데뷔전 치곤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탄하셨다. "우승할 수 있었는데 말이야. 골프채만 좋았어도…. "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못해주고 있다는 무력감으로 괴로워하셨다.

당시 아버지는 주위로부터 "돈도 없는 주제에 무슨 골프를 시키냐" 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더 심한 말도 들었다.

"돈에 눈이 멀어 딸을 학대하고 있다" 는 따가운 눈총도 받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분을 삼켰다.

돈도 돈이지만 아버지가 나에게 들인 공은 사랑 없이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가끔 말하신다. "야, 세리야. 우리나라에 골프 박사학위 주는데 없냐. 너 때문에 골프박사 다 됐다. " 실제로 아버지는 그랬다.

비디오며 책이며 어디서 들은 얘기 등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나에게 전수시켰다.

어떤 스윙이 좋다더라고 하면 아버지는 직접 연습을 통해 점검한 뒤 내 몸에 맞게 다시 고안해 연습시켰다.

박사학위라도 딸 것처럼 골프 책을 들고 씨름하셨다.

"예전에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으면 지금 판.검사가 됐을 거야. " 이럴 때의 아버지는 정말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표정이셨다. 아버지가 다시 그런 말을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판.검사보다 지금의 아버지가 훨씬 더 좋잖아요. 박세리 아버지라면 이제 세상이 다 알아주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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