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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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34

"그래도 다방 지킴이 아니랄까봐 눈 깜짝할 사이에 이천오백원짜리 생강차 한 잔 어느 새 홀라당 마셔버렸네?"

때마침 주방 언저리에 설치된 공중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전화벨 소리가 한 번밖에 울린 것 같지 않은데, 수화기를 냉큼 들어 응대하는 목소리는 귀에 익은 형식의 목소리였다.

형식이도 아비의 전화인 줄 대뜸 알아채고, 변씨가 묻기도 전에 먼저 물었다.

"아버지. 거기 한선생님 있으면 바꿔 주실래요?" "한선생은 왜?" "서울서 한선생 딸이란 여자애가 오늘 도착했걸랑요. " "뭐. 한선생 딸기가 도착해?" "한선생님 딸이 찾아왔단 말입니더. 딸, 딸요. 그러니까 한선생 좀 바꿔주세요 . " "한선생 이 자리에는 없다.

걔는 지금 니하고 같이 있냐?" "아니요. 방금 승희 아줌마가 와서 데리고 나갔걸랑요. " "야, 이자식아. 왔걸랑요 갔걸랑요 하는 말버릇은 언제부터냐?

그거 냉큼 빼지 못해?" 와락 덤비는 아비의 핀잔에 찔끔했던지 형식은 화들짝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런 본데없는 놈. 지도 이젠 쓸개가 생겼다고 버르장머리 없이 지 먼저 전화를 딸깍 끊어버리네. 대한민국은 가장 골칫거리가 바로 교육문제여. 쌔빠지게 벌어가지고 애새끼 학교 보내봐야 애비한테 대들기나 하는 방법 가르쳐주는 게 고작이여. 교육부장관 테레비에 나오는 것 보니까 꽤나 영민하게 생겼던데, 교육개혁은 왜 아직 안하노. 열적고 비위 상해서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소파로 가서 털썩 주저앉는데, 어느 새 주방으로 돌아간 아줌마가 전화통화를 엿들었던지 아는척하고 거들었다.

아저씨 딸기장사 하시는가 봐요. 대꾸는 않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불량스런 변씨의 눈자위에 가위가 질린 아줌마는 얼른 주방 찬장 아래로 몸을 숨겨버렸다.

사천원을 던져주고 철규의 좌판으로 찾아갔다.

형식에게 들었던 대로 여식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달해 주었더니 무척 놀라는 기색이긴 했으나 서둘러 좌판을 거둘 생각은 하지 못했다.

볕에 새까맣게 탄 얼굴과 입성이 꼴불견인 자신을 여식에게 보이기는 주저될 것이었다.

여식이 주문진까지 찾아올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었다.

그러나 냉큼 서두르지 못하는 까닭이 없지는 않았다.

오늘의 매상을 건너편 좌판에서 지켜본 과일장수 행상들이 몰려와서 저녁을 사라고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3만원을 건네주고 일행은 장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시가지를 벗어날 때, 적재함이 들까불 정도로 장짐은 가벼워졌다.

늑장을 부리는지 뜸을 들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철규는 장릉의 보리밥집에서 저녁을 먹고 출발하자는 제의를 했다.

해롭지 않게 생각한 그들은 보리밥집으로 가서 저녁을 걸게 먹었다.

그러나 변씨만은 구미를 잃었는지 일찌감치 수저를 놓아버렸다.

그의 눈길은 사뭇 마당가 살평상 곁에 무더기로 피어 있는 불두화 (佛頭花) 나무에 머물러 있었다.

절간에서만 간혹 눈에 띄는 불두화는 그 꽃송이가 축구공에 비유할 만큼 복스럽고 둥글지만, 불행하게도 무성화 (無性花) 이기 때문에 향기가 없어 나비가 날아들지 않고, 꿀을 잉태할 줄 몰라 벌조차 외면하는 소복 입은 여자 같은 불행한 꽃이었다.

그러나 또한 미욱하여 해마다 오월이 돌아오면 밀도를 한껏 가다듬어 저들 자신조차 비좁도록 터질 듯이 하얀꽃을 피우는 것이었다.

사계절의 감정을 예민하게 더듬어 갈 줄 아는 어엿한 생화이면서도 운명적으로 조화의 조건만 갖추는 데 모든 열정을 바치는 불두화의 모순과 아름다움은 문득 잊고 있었던 승희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쩌면 누구보다 승희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늙바탕인 자기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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