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경제]서울시내 현장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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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회사택시 (진양상운) 운전기사 박성범 (32) 씨는 요즘 회사 의무납입금 7만4천원을 채우지 못해 자기 돈 1만~2만원을 메워넣기 일쑤다.

"미터기 기준으로 5천원 이상의 장거리를 타는 손님이 거의 없어졌어요. 물 좋던 강남의 뱅뱅 사거리 술집골목에서조차 피크타임인 오후 10시 이후에 빈차로 돌아다니는 경우가 허다해요. "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녀봐도 일부 고급나이트클럽과 술집 골목을 제외하면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 전에 비해 유동인구가 30~40%는 줄었다고 그는 전했다.

"체감경기요? 차에 타는 손님들 대부분이 수입이 절반 가량 줄었다고 울상들이에요. 그쪽은 어때요?" 라며 그는 반문했다.

서울의 중심 상권인 서소문.명동.지하철 사당역 주변 상황. 사무실 밀집지역인 서소문 대로변의 꽃집 테라스. 진열대를 빼곡이 채운 꽃들로 향긋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지만 손님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30년째 영업을 하고 있는 이 집은 매출의 절반 이상을 동아건설.대한통운 등 대기업들의 단체 꽃 수요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거래회사들이 생일.진급.결혼기념일 선물에 쓰던 꽃 매입을 끊으면서 이 가게의 수입은 기본적으로 절반 가량이 줄었다.

"요즘엔 행인들에게 매출의 전부를 의존하고 있지만 그나마 예전같으면 장미 10송이씩은 사던 손님들이 1~2송이로 기분만 내는 경우가 많아요" 라고 점원은 힘없이 말했다.

명동성당에서 롯데백화점으로 통하는 이른바 '금융거리' . 쇼핑객과 데이트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이곳도 경기가 차갑기는 마찬가지다.

옛 코스모스백화점 건너편에서 중.저가 여성의류매장 삼원을 운영하는 이양자 (61.여) 씨는 요즘 경기를 묻자 핸드백 속에서 편지 한통과 영수증 몇 장을 꺼냈다.

편지내용은 "임대료를 낼 형편이 안되니 경기가 좋아질 때까지만 보증금에서 임대료를 제해 달라" 는 건물주인에 대한 눈물어린 호소였고, 영수증은 지난 두 달간의 임대료를 마련하기 위해 李씨가 전당포에 맡긴 결혼패물 보관증이었다.

"둘러보면 아시겠지만 세집 걸러 한 집은 개점휴업이에요. 문을 닫고 싶어도 개업할 때 문 권리금 (보통 1억원 이상) 을 손해볼 수 없어 울며겨자먹기로 장사를 계속하는 점포주들이 허다해요. " 명동상가번영회 김재훈 총무부장은 李씨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해주었다.

지난해 여름만 해도 하루 20만명 (주말기준)에 달했던 유동인구가 최근 12만명선으로 무려 40%가 줄었고 점포들의 매상은 IMF 이후 업종 구분 없이 평균 50% 이상씩 줄었다고 그는 말했다.

사보이 호텔 일대와 지하철 명동역에서 을지로 입구로 통하는 일명 '구두거리' 엔 몇 개월째 주인 없는 빈 매장이 즐비하다고 그는 귀띔했다.

대부분 손님들이 값싼 물건만 찾을 뿐 중가품 이상은 아예 눈도 돌리지 않기 때문에 최근 명동거리엔 1만원대 저가품을 취급하는 노점상들이 대거 파고들고 있어 명동은 이제 브랜드의 거리에서 동네시장으로 바뀌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사당역 네거리의 호프집 '하이트 1번지' . 평소 오후 7시쯤이면 귀가 전에 한잔 걸치고 가는 직장인들로 한참 붐빌 이곳도 썰렁하기만 하다.

주방에서 TV를 보다 손님을 맞는 주인 임경석 (42) 씨는 "아저씨가 오늘 개시 손님이에요" 라며 메뉴판을 내밀었다.

바로 옆의 사진관 '우성칼라현상소' . 이 집은 그래도 호프집보다 조금 나은 편이다.

요즘 한달 매출은 3백만원 선으로 IMF 전에 비해 40%가량 줄었다고 주인 최상근 (60) 씨는 밝혔다.

"필름 판매는 물론 현상.인화 주문도 크게 줄어 겨우 유지만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IMF한파로 놀러가는 사람들이 줄어든 탓 아니겠어요" 라며 崔씨는 한숨을 쉬었다.

사당역 출입구에서 10년째 구두닦이를 하고 있는 이재천 (41) 씨는 이곳의 주변경기를 자신의 수입과 관련지어 50% 이하로 떨어졌다고 딱 잘라 말했다.

지난해 가을만 해도 하루 최소 70켤레는 닦았는데 요즘은 50켤레도 주문을 받지 못한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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