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씨 하나로 300억 날릴 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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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내 대기업 A사는 2001년 신항만 건설에 나서면서 유럽 기업인 B사에 항만 준설을 맡겼다. 그런데 3년 후 두 회사 사이에 분쟁이 생겼다. 국세청이 B사의 초대형 준설선을 국내 고정사업장으로 보고 B사에 300억원대의 법인세·부가가치세 등을 부과한 것이다. B사 측은 “준설공사를 맡긴 A사에서 세금을 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자 A사 측은 “B사에 부과된 법인세 등을 우리가 왜 내느냐”고 맞섰다.

결국 두 회사는 2007년 5월 국제상업회의소(ICC) 국제중재법원을 통해 국제중재 절차에 들어갔다. 캐나다의 헨리 알바레스 변호사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재인들로 중재판정부가 구성됐다. 두 회사가 국내 대형 로펌들을 각각 대리인으로 선임한 가운데 지난해 12월 서울에서 변론이 진행됐다.

공방 과정에서 계약서에 기재된 ‘조사’ 하나가 핵심 쟁점으로 등장했다. “어떤 모든 원천징수세도 A사가 부담한다”는 문구를 두고 B사 측이 “한국어 조사 ‘도’는 ‘또한(also)’이라는 의미”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원천징수세 또한 A사가 부담한다’는 뜻인 만큼 원천징수세가 아닌 법인세 등 다른 세금도 A사가 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해 A사 측은 “한국어에서 ‘어떤 ~도’는 강조의 의미를 담은 것이란 점에서 ‘또한’과는 다르다”며 “문제의 문구는 원천징수세만 부담하면 된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어떤 변호사도 이 법률의 적용을 받는다”고 할 경우 변호사를 강조한 것이지, 다른 직업까지 법률의 적용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외국인들로 구성된 중재판정부는 양측이 주장을 굽히지 않자 동시통역사에게 물었다. 동시통역사는 A사 측의 해석이 옳다는 의견을 내놨다. 중재판정부는 양측이 제시한 서류와 변론 결과 등을 검토한 끝에 최근 A사의 손을 들어줬다.

A사를 대리했던 법무법인 광장의 임성우 변호사는 “조사 하나에 수백억원이 걸린 분쟁의 향방이 달라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며 기업들의 주의를 당부했다. 임 변호사는 “만약의 분쟁에 대비해 계약서 작성시 전문가의 검토를 거쳐 정확하게 문구를 다듬어야 한다”면서 “계약 과정에서 오갔던 서류들을 잘 정리하는 것은 물론, 협의 내용을 문서로 남겨두는 치밀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06년 캐나다에서는 한 정보통신 회사가 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서에 쉼표를 잘못 찍는 바람에 20억원의 손해를 보기도 했다.

권석천 기자

◆국제중재=국제 분쟁을 특정 국가 법원의 재판에 의하지 않고 중재인에게 맡겨 판정을 내리게 하는 제도. 최근 국내에서도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재판 대신 국제중재를 활용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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