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공권력 체질개선 기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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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하루하루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감원이니 봉급삭감이니 온통 어둡고 무거운 대화뿐이다.

비가 내리는데도 서소문공원 철조망 담장에는 이불.담요.옷가지 등 서울역 주변 노숙자들의 빨래가 그대로 널려 있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모든 게 귀찮으니 빨래걷기마저 포기한 것 같다.

장마까지 겹쳐 후텁지근한 날씨가 계속되는 바람에 세상만사가 더욱 짜증스러워지는 요즈음이다.

나라가 전례없는 경제난에 빠져 있으니 백성이 고통을 겪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이 경우 통증은 권력 또는 경제력이 떨어지는 소외계층이나 서민들부터 느끼게 마련이고 힘없는 사람일수록 아픔이 심각하다는 것은 정한 이치다.

때문에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 이후 정부는 고통분담과 국난극복을 위한 개혁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아마 현 정부는 모든 것을 여기에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정부의 의지가 일선 행정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상급기관은 몸부림치지만 이를 실천해야 할 하급관서에선 아직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아래 위 맷돌이 따로 돌아 서로 안맞는 격이라고나 할까. 이같은 현상은 특히 경찰이나 검찰 등 공권력을 가진 기관일수록 잘 나타난다.

한 예로 큰길을 막고 하는 음주단속은 경찰의 편의적 발상이라고 여러번 말썽이 됐지만 전혀 달라진 게 없다.

편도 4차로의 대로를 막기 일쑤고 차량이 수십m씩 기다려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측정기에 줄줄이 입을 갖다대는 시민들의 위생문제나 통행지연에 따른 불편.손해는 안중에도 없다.

또 단속 경찰관의 태도는 얼마나 고압적인가.

또 '술 마시고 운전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 를 단속하라는 것이 관계법의 취지다.

지금처럼 모든 운전자를 상대로 하는 '막고 뿜기식' 단속은 인권유린이요, 공권력의 횡포가 아닌가.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길을 막고 하는 음주단속은 상상할 수 없는 일로 지그재그 운행 차량이나 외견상 음주운전이 확실한 경우에만 정차시킨다.

또 운전자에게 1에서 10까지 거꾸로 세어보게 하거나 반듯한 줄 위를 걸어보게 한 뒤 비로소 측정을 할 정도로 신중을 기하고 있다.

서울의 한 경찰서가 하루저녁 5시간 가량 길목 3~4곳을 막아 적발하는 음주운전자는 평균 7명 정도다.

길목당 수천명에게 불편을 주면서 겨우 2명 정도를 잡아내는 꼴이니 인력.시간낭비는 아닌지 효율도 따져봐야 한다.

물론 음주운전 단속은 철저히 해야 한다.

또 일제단속의 예방효과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목적이 좋다고 수단이나 절차에 잘못이 있어서는 안된다.

시민보호나 안전 위주의 단속이 아니라 단속을 위한 단속, 적발을 위한 단속은 더욱 문제다.

이밖에 간선도로 검문소의 구태의연한 운영도 바뀌어야 한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 평시에도 부근 차로를 줄여놓아 검문소를 통과하려면 상당한 시간을 지체하게 만든다.

형식적인 검문으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경찰 간부들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수십년전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권침해 시비가 계속돼도 임의 동행.밤샘조사 등 옛 수사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검찰도 비슷하다.

국민 관심사인 경제비리나 법조비리 수사는 구렁이 담넘어가듯 하더니 경찰의 수사권 독립.법원과의 마찰 등에서는 단호하고 민첩했다.

또 공직자 부정부패 방지를 위해 특별법을 만들고 수사 전담기구를 대통령 직속으로 신설한다는 계획에는 무슨 큰 일이나 난 것처럼 반대 목소리를 높이기에 바빴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달라지겠다는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고 과거의 행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볼썽 사나운 모습이다.

지금은 공권력이 국민편에 서서 인권과 재산.생명보호를 위해 체질개선을 해야 할 좋은 기회다.

새 정부가 들어선데다 다른 행정부처 사업과 달리 공권력의 민주화에는 별도 예산이 필요없기 때문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공권력만 바로 서면 다른 행정기관의 기강은 저절로 잡히게 마련이다.

IMF위기에 그동안 켜켜이 쌓인 공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나 피해의식 등 부정적 이미지를 씻을 수만 있다면 이번 경제난이 결코 헛되지만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권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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