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式 ‘스케일 외교’로 중국 ‘以夷制夷 덫’풀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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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997년 2월 12일, 황장엽 선생이 베이징에서 극적으로 망명하던 날이었다. 중국 연수 중이던 기자는 황 선생이 피신한 베이징 산리툰의 한국영사관을 잠복 취재했다. 중국 공안들의 삼엄한 검문과 제지를 피해 눈치껏 거리를 배회하며 황 선생이 탔을지 모를 차량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름가량 베이징의 칼날 같은 삭풍을 맞았다. 내복을 껴입어도 뼈마디가 시렸다.

기자의 마음을 더욱 시리게 한 것은 황 선생을 둘러싼 남북의 막후 쟁탈전이었다. 양측의 외교관과 밀사들은 중국 정부를 상대로 ‘읍소(泣訴)’작전을 펼치다시피 했다. 오전에 남측 인사가 외교부 청사를 방문하면 오후에 북측이 들어가는 식의 시소게임을 했다. 상대방을 따돌리려 차량 번호판을 가리는 위장 작전까지 동원됐다. ‘처분권’을 쥔 중국 측은 선문답 같은 단어로 남북의 애간장을 녹였다.

기자의 뇌리에서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단어가 수없이 맴돌았다. “남북이 싸우면 중국의 그늘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겠구나….” 통렬한 깨우침의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2년이 흘렀다. 한·중은 양(量)과 질(質)에서 유례없는 관계 발전을 이룩했다. 북·중 혈맹의 그림자는 희미해지고 장쩌민(江澤民) 시대 이후 동북아엔 실용 외교 모드가 흘렀다. 한·중 양국은 이명박 정부 들어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됐다.

하지만 북한의 5·25 핵실험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이 지켜온 ‘두 개의 한국’ 노선을 다시 일깨워줬다. 후진타오 체제는 핵무장을 한 북한을 변화시키려는 게 아니라 한반도 현상유지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중국은 2006년 10월 제1차 핵실험 때 행한 대북 원유공급 축소 같은 제재조치를 하지 않았다. 친강(秦剛) 외교부 대변인은 25일 대북 지원 중단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북한의 민생과 정상적인 경제무역 행위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중국은 유엔 안보리 제재안이 통과될 때도 브레이크를 걸면서 북측 입장을 배려했다. 12년 전 중국의 한 관료는 “중국은 (역사가)길고 (땅이)넓고 (인구가)많아 정책을 바꾸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한반도 정책도 비슷할 것이다. 반면 중국 지식인들의 기류는 다르다. 한 지인은 최근 e-메일을 통해 “중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비공개 석상에서 6자회담 무용론(無用論)을 펼치면서 5자 안보회담 제안에 동조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가이익에 그토록 민감한 중국 지도부가 북한의 핵무장을 묵인하는 속셈은 과연 무엇일까. 혹여 핵을 가진 김정일 체제가 중국의 몸값을 올려줄 것으로 판단하는 것인가. 중국 역대 왕조가 주변국들을 다뤄온 ‘이이제이 DNA’가 작동하는 것인가.

이 대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중국을 움직이지 못하는 한국의 초라한 외교역량이다.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은 두 개의 모순된 명제를 안고 있다. 북한은 가상적국이자 언젠가 합쳐야 할 형제다. 보수·진보 간의 남남 갈등이 멈출 수 없는 이유다. 더욱이 중국처럼 남북 등거리 외교를 펼치는 주변국이 있는 한 북핵 해결 역시 요원하다.

난세는 영웅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겪는 한국 외교의 실패를 ‘외교적 수사(修辭)’로 미봉하면 안 된다. 외교안보 전문가 사이에선 이명박 정부 들어 가장 후퇴한 분야가 남북 관계와 대중 외교역량이라는 지적이 잇따른다.

1300여 년 전 한반도의 약소국이던 신라를 통일 주역으로 도약시킨 김춘추(태종무열왕)는 중국어·일본어를 구사하면서 고구려·당(唐)·왜(倭)를 누비던 당대 최고의 전략가이자 외교가였다. 고구려·왜에 가선 생명을 위협받는 장기 연금 생활까지 겪었다. 당 태종을 만나러 갈 때는 100일 넘게 5000리를 달려 장안(長安)에 도착했다. 이이제이 전략을 고수하던 당 태종을 움직인 것은 바로 당을 겨냥한 ‘신라-고구려 연합’ 가능성이었다.

일각에선 북핵 위기 때문에 중국이 김정일 체제를 포기하면 남북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는 희망 섞인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에게 김춘추 같은 열정과 용기와 능력을 갖춘 인물이 없는 한 이런 담론들은 무의미할 뿐이다. 북핵의 장기 해법은 이명박 대통령이 앞장서서 산불끄기식 땜질 외교를 타파하고 안보·번영·통일의 ‘비전 외교’를 펼치는 것이다. 김정일 체제가 끝까지 핵무장과 남북 대결을 고집한다면, 7000만 통일한국이 주변국에 훨씬 더 매력적인 친구가 될 수 있음을 설득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중·일 경제협력체를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협력 구상은 북한과 중국을 두루 아우를 비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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