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산하 북녘풍수]19.인민대학습당과 주체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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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평양은 수성 (水星) 의 땅이다.

이익의 '성호사설 (星湖僿說)' 천지문 '지경 (地鏡)' 조에는 고려 선종 3년 평양 남쪽 거리에 지경이 나타나 70여 보 밖에서 보면 물과 같은 그림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지경이란 "땅에 고인물 (地鏡 地之積水)" 이라 하였으나 제대로 된 설명은 아닌 듯하다. 아지랑이와도 비슷한데 훨씬 더 신비함을 드러내는 땅의 현상이다.

성호도 지적한 것처럼 평양의 그런 변괴는 지기 (地氣)가 왕성해서 된 것일 수도 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행주형 (行舟形) 의 부지 지세가 만들어낸 교묘한 수증기 현상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을밀대에서 능라도쪽을 바라보니 한겨울인데도 초봄처럼 엷은 안개가 끼어 있다. 점심 먹는 자리에는 꼭 술이 따라 나온다.

그래서 분위기가 더욱 화기애애하고 대화내용에도 농담이 곁들게 마련이다.

'안내원선생' 중 나이 지긋한 한 분이 내게 "최선생, 좋은 산소자리 하나 잡아 주시기요" 하며 농담을 건넨다.

물론 웃자고 한 얘기인데 워낙 성품이 곧고 학자풍인 리선생이 정색을 하며 그 말을 무지른다.

"최선생은 그따위 '가짜풍수' 를 하는 분이 아니고 '민족지형학자' 란 말입니다. " 그런데 그 말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다.

풍수를 전공하면서 지금까지 온갖 수모를 다 겪어 왔는데 내가 추구하고 있는 그것을 '민족지형학' 이란 단적인 표현으로 지적해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풍수적으로 평양의 명당 (明堂) 혈처 (穴處) 는 어디쯤 될까? 지리학전공자인 내게는 당연한 관심사가 될 터인데 점심 식사 중에 마침 그 얘기가 나왔다.

그들 말로는 "평양의 명당 핵심 자리는 바로 '인민 대학습당' 터" 라는 김일성 (金日成) 주석의 얘기가 있었다고 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우리는 곧장 인민대학습당으로 향했다.

실제로도 인민대학습당은 평양 중구역의 가장 중심되는 위치에 서 있었다.

건물 바로 밑에 인민군의 열병.분열을 사열하는 주석단이 자리잡고 있고, 또 그 밑에는 우리의 '도로기준원표' 에 해당하는 '평양 나라길 시작점' 이란 돌비석이 조그맣게 세워져 있다.

사실상 북한의 중심 축선에 해당하는 선이다.

그 좌우로 정부종합청사가 들어섰고 앞으로는 약간 비껴서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 조선미술박물관이 양쪽을 받쳐주며 대동강 건너로는 역시 일직선상에 '주체 사상탑' 이 우뚝하다.

그 사이 공간에 김일성광장이 마련돼 있어 권위주의적 공간 배치로는 나무랄 데가 없어보인다.

인민대학습당에 들어가면 1층 중앙홀에 북한의 중요 건물 어디서나 그런 것처럼 김일성주석의 좌상이 거대한 백두산 벽화를 배경으로 배치돼 출입자를 압도한다.

연건평이 10만㎡에 이른다는 인민대학습당에는 6백여개의 방에 10여개의 열람실, 17개의 '록음강의실' 이 있으며 5천여석의 좌석과 3천만권의 장서능력 (현재는 2천7백만권을 소장) 이 갖춰져 있다고 한다.

한 열람실에 들어갔을 때 동행한 통일문화연구소 권영빈소장이 마침 책을 읽고 있던 여학생에게 "대학생인가요?" 라고 물으니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예, 평양기계대학 금속기계공학과 3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열람실 옆에는 방마다 문답실이 있어 2백50여명의 연구원이나 교수들이 열람자들의 질문에 즉석에서 답을 해준다고 한다.

도서관 기능을 하면서 교육도 병행하는 일종의 사회교육기관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도서 대출대에서 책 대출 업무를 하고 있는 여직원의 얼굴은 마치 어릴 적 담임선생님을 연상케하는 고전형이다.

우연히 책 한권을 집어보니 영문으로 된 '기업의 정신 (Spirit of Enterprise)' 이라는 책이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그런 책을 만나게 된 것은 의외였다.

복도에서는 직원 10여명이 '김정숙탄생 80돌기념일' 을 준비하는 율동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역동적인 율동인데 고구려식 춤사위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듣고 본 평양 사람들의 노래와 춤은 마치 어릴 적 동네극장에서 본 '쇼' 를 연상케 할 만큼 복고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 사실이 그렇다는 뜻이다.

여하튼 사소한 일 하나 하나가 신기하기만 한데 그런 걸 신기해 하는 것 자체가 또한 신기한 일이다.

같은 민족이고 행동도 다를 바 거의 없지만 오랜 시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게다.

인민대학습당에서 주체사상탑으로 가기 위해서는 김일성종합대학을 거쳐 능라도를 가로지르는 능라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면 동평양지역으로 지금은 대동강구역.동대원구역 등으로 이뤄져 있다.

오른쪽으로 대동강이 흐르고 왼쪽으로는 동평양대극장.평양볼링관.김일성고급당학교 등이 줄을 이어 나타난다.

조선기록영화촬영소 앞에 그 높다란 주체사상탑이 자리하고 있다.

강 건너 평양 명당의 핵심이라는 인민대학습당.김일성광장과는 일직선상으로 마주하고 있는 위치다. 주체사상탑은 1982년 완공되었다는데 공사 기간이 2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높이 1백70m 꼭대기에 있는 붉은 봉화탑만도 20m에 이르는 거대한 조형물이다.

김일성주석의 70회 생일을 맞아 세운 것이기 때문에 70년을 날짜로 헤아린 숫자인 2만5천5백50개의 화강암을 다듬어 축조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북녘 사람들의 숫자에 대한 관념은 강박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확고하고 정확하다.

좌향은 서남서향으로 이들이 풍수 이론적 상징성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체탑의 꼭대기에 올라 평양을 조망한다.

한눈에 평양뿐 아니라 그 일대가 다 바라보인다.

북쪽으로 능라도 맞은편은 문수거리라 부르는데 옛날 문수리 비행장이 있던 곳이다. 강변으로 대동문.연광정.부벽루.을밀대가 보인다.

동남쪽으로는 그 끝이 아스라하여 어지러울 지경인 낙랑준평원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마치 베이징 (北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륙을 연상케 하는 풍광이다.

동쪽 들판 가운데쯤 문수봉 (紋繡峰) 이 보이는데 그 아름다운 이름 때문일까, 일대에 평양음악무용대학.평양연극영화대학.평양미술대학이 거의 붙어있다시피 모여 있다.

문수가 끌어들인 예술의 장, 풍수는 여기서도 그 인연을 찾고자 한다.

글 = 최창조.그림 = 황창배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차장)

※다음 회는 '단군릉'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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