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14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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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서로 우산을 양보하다가 빗물에 함빡 젖은 두 사람이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점심밥이 준비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변씨는 승희와 마주 앉아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농촌 사람들은 농촌 사람들대로 어촌에서는 어촌사람들대로 그 엘레노이 (엘니뇨) 인가 지랄인가 때문에 고통 받기는 마찬가지여. 보리농사를 다 지어놓고 엘레노이 때문에 후덥지근한 날씨가 계속되자, 보리이삭이 겉마르고 곰팡이 병이 번져 보리농사를 망치고 말았어. 날씨가 느닷없이 일찍 더워지면서 곡식들 뿌리에 기생하고 있는 해충들이 일찍 알을 깨고 나와서 나뭇잎 대신 새순을 갉아먹고 있다는 게여. 육칠월이 제철인 식물들이 오월부터 움이 트면서 잎만 무성해서 마늘이나 양파 같은 농작물들은 알맹이가 없게 되었어. 겉보기에는 바닷물이 일찍 뜨거워졌다는 한 가지뿐이지만, 이게 바로 말세가 왔다는 징조여.

삼월 하순에 피어야 할 개나리는 한 달이나 먼저 피었다가 순식간에 져버리고, 오월 초순에 나올 나비도 사윌 초순에 나타났고, 오월 하순에 들어야 할 뻐꾸기 울음소리도 한달 먼저였어. 수천만년 내려오던 자연의 수레바퀴가 순식간에 뒤바뀌어버린 이치가 뭔지 알어? 바른쪽으로 돌던 시계바늘이 갑자기 왼쪽으로 돌아간다는 얘기고, 허파에서 생산되던 피가 미주알에서 생산된다는 얘기와 똑같은 얘기여.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농작물에는 병해가 기승을 떨고 여름과일에는 단맛이 떨어지고 여름 철새들은 번식기를 놓쳐버려 암컷이든 수컷이든 제구실을 못하고, 새들은 무정란을 낳게 되겠지. 해수면 온도가 상승해서 비브리오균이 득실거리게 돼. 아카시아 꽃이 한 달이나 일찍 피면서 분봉 시기를 놓친 벌들이 우왕좌왕하다가 느닷없이 도회지 빌딩 추녀 아래로 몰려온다는 얘기는 가관이 아니고 뭐여. 벌들의 생활을 봐.

수천만년 전부터 시계바늘보다 더 정확했던 게 벌들이었대, 갈팡질팡하고 있는 게 바닷물이 일찍 뜨거워진데서 연유한다는 것이 놀랍지 않어? 사람들의 발걸음도 없는 심심산골에서 야생화의 꽃술이나 더듬고 있는 벌 같은 미물이 몇 천리 밖에 있는 바닷물 뜨거운 것과 인연을 맺고 있다는 조화가 신기하지 않어? 그 뿐만 아니지. 서로 상부상조하던 꽃과 벌레들도 마찬가지여. 사월에 나온 벌레는 사월의 꽃과 살고 오월에 나오는 벌레는 오월의 꽃과 더불어 살게 마련인데, 이것들이 뒤죽박죽되니까. 장차는 미물인 벌레들도 살아남기 글러버렸어.

벌레가 있어야 두꺼비가 살고 두꺼비가 있어야 뱀이 살고 뱀이 있어야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이 생겨난 이래로 있어온 조화이고 이치가 아니겠어. 상부상조한다는 게 바로 그거여. 그러나 내년에 한번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을 보게 될거여. 삼월에 나오던 개구리가 오월에 나오고 사월에 나오던 나비는 오월에 나오겠지.

그렇지만 올해는 삼월 초순에 피었던 개나리가 제자리를 찾아서 삼월 하순에 피고 오월 하순에 들었던 뻐꾸기 소리가 사월 초순으로 자리를 잡게 될거야. 그런 뒤죽박죽이 이삼년만 곱빼기로 계속되면, 장수하늘소 보려고 박물관으로 찾아가고 두꺼비를 보려고 관광단을 조직해야 될지도 몰라. 수십만년 동안 일정하게 적응해오던 생태계에 혼란이 거듭되면 살아남을 짐승도 없고 벌레도 없지.

사람인들 살아남을 수 있겠어? 사막에서 난로를 파느니,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파느니, 아프리카 미개인들에게 신발을 파느니, 미국년들에게 가발을 파느니, 도둑놈에게 권총을 파느니, 바늘에서 선박까지라고 지랄들 떨고 있지만, 우리가 기대고 살아갈 바탕이 망가지고 있는데 돈 벌어 잘살아본다는 말이 어쩐지 허황하고 뒤숭숭하게만 들린다구. 비단옷 입고. 똥통 위에 앉아 살아보았자 무슨 낙이 있겠나. "

그리고 변씨는 목구멍에 고인 가래를 드윽 긁어내어 낙수가 후두둑 떨어지고 있는 마당 한가운데로 뱉어 냈다. 비가 긋지 않고 사뭇 내리고 있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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