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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이념갈등보다 빈부격차가 더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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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사건은 먼지다’.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이 남긴 말이다. 브로델은 사회적 시간을 단기지속, 중기지속, 장기지속으로 구분하고 이에 각기 사건사, 사회사, 구조사를 대응시킨 바 있다. 그에겐 어떤 사건이라 하더라도 국면과 구조 안에 놓여 있는 것이며, 따라서 사건은 먼지처럼 그렇게 큰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새삼 브로델의 경구를 떠올리는 것은 최근 한국 정치에 흐르는 다층적 시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을 우리 정치에 적용하면, 올 상반기처럼 사건들이 분출한 때도 드물고, 그만큼 정치란 대체 무엇인가의 질문을 수없이 던진 시기도 드물 것이다. 정부가 존재하되 제대로 신뢰를 얻지 못하고, 국회가 존재하되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게 바로 우리 정치의 현실이다.

우리 정치가 이렇게 위기의 덫에 빠진 것은 2006년 지방선거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의사결정권은 정부와 여당이 갖고 있지만, 사회적 공론의 무게 중심은 반대 세력에 놓여 있는 ‘불안정한 균형’의 교착상태가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국정을 탄력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 지지율이 절반은 아니더라도 40% 이상은 돼야 하는데, 노무현 정부든 이명박 정부든 만성적인 ‘지지의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해 왔다.

정치적 다수와 사회적 다수가 이렇게 부조응을 이루는 상태에선 사건들이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격렬한 공방전 속에 이른바 정치적 전선은 한층 강화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정치에 대한 관심이 더없이 높아지는 동시에 정치에 대한 환멸도 비례해서 커지는 ‘정치 부재의 정치’가 되풀이된다. 둘째, ‘사건의 정치’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그 사건들이 놓인 ‘국면의 정치’가 상대적으로 간과되기 쉽다.

현재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국면의 정치를 명명하라면 나는 ‘양극화의 정치’라고 이름 짓고 싶다. 국면사적 차원에서 현재 우리 정치가 직면한 최대의 과제는 세계화가 가져오는 양극화에 대한 대처다. 지난가을 가시화된 경제위기 이후 조정 국면을 맞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교리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양극화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아 왔으며, 이 양극화가 우리 사회 전체를 새롭게 재구조화하고 있다. 이에 관해 나는 두 가지 지표를 주목하고 싶다.

하나는 5월 26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근로빈곤층의 추이다. 자료에 따르면,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근로빈곤층의 규모가 올해 경제전망치에 따라 179만 명에서 242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는데, 이는 지난 2007년의 156만 명에 비해 최대 55%나 증가한 수치다.

다른 하나는 5월 30일 발표된 통계청 자료다. 이에 따르면, 올 1분기 하위 20% 계층의 월평균 가계소득은 85만5900원으로 1년 전보다 5.1% 준 반면, 상위 20% 계층의 소득은 742만5000원으로 1.1% 증가했다. 그 결과, 빈부격차를 보여주는 소득 5분위 배율(상위 20%의 소득을 하위 20%의 소득으로 나눈 것)이 지난해 1분기 8.41배에서 올해 1분기 8.68배로 급등했는데, 이는 2003년 통계 작성 이후 기록된 최대치다.

바로 이 점에서 현재 우리 정치에 부여된 최대의 과제는 양극화 해소를 위한 시급하면서도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시급한 이유는 지금 이 시간에도 빚을 내어 또 한 달을 버텨야 하는 서민들과 적자를 견디지 못해 문을 닫아야 하는 자영업자 및 중소기업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그것이 근본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양극화의 원인 중 하나가 세계화에 있다면 과연 어떤 세계화가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중장기적으로 사회적 합의를 모아가야 한다는 데 있다.

사건사에 주목하는 적잖은 이들은 통합의 위기를 지적한다.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념 갈등에 따른 정치적 통합의 위기보다 더 큰 위기는 양극화에 따른 경제적 통합의 위기다. 중산층은 빈곤계층이 되고 빈곤계층은 극빈계층이 되는 상황 아래서는 이념 및 정치 갈등에 대한 그 어떤 치유법도 기실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오기 어렵다.

사건이 먼지라는 브로델의 주장은 분명 과장된 것이다. 그럼에도 사건이 국면 안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눈앞의 사건에서 잠시 떨어져 위기의 국면을 돌아보는 정치적 지혜를 요청하고 싶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