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제주도민을 누가 낯 뜨겁게 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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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7일 한 시민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표면화된 괴편지 사건이 대표적이다. A4용지 두 장 분량의 이 편지는 내년 지방선거 출마 예상자 가운데 김태환 지사를 제외하고 전 제주지사, 전 부지사, 전 서귀포시장 등 7명의 전력과 사생활을 조목조목 적고 있다. 낯 뜨거운 내용을 친절하게(?) 제주 사투리로 썼다. 제주시·서귀포시를 중심으로 각급 기관·단체는 물론 일반 가정에 1000여 통이 배달됐다.

편지에 언급된 인사들은 ‘계획된 선거범죄’ ‘정치공작’이라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이 더 잘할 수 있도록 박수를 쳐줘야 한다”고 격려(?)를 받은 김 지사는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김 지사는 “제주사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 갈등을 조장하려는 고도의 전략”이라며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제주의 유일한 국립종합대인 제주대는 총장 선거를 둘러싸고 심각한 내홍에 빠졌다. 1월 말 선거를 거쳐 총장 후보를 뽑았지만 교육과학기술부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은 것이 발단이다. 특정인이 음해성 투서를 돌려 총장 후보자가 낙마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재선거를 치러야 하는데도 반목이 심해 선거일정조차 잡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서귀포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시민단체가 제주지사 주민소환 투표 청구에 필요한 서명을 받는 곳에서는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내 편, 네 편으로 갈려 고성을 주고받으며 멱살잡이도 불사한다. 상대방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 사람만 건너면 혈연·지연·학연으로 연결돼 도민 모두가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인구 56만 명의 제주도. 포근하고 정감 넘치는 분위기는 간데없고 반목과 질시로 가득하다. 분열과 갈등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제주도까지 상륙한 것 같아 안타깝다.

양성철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