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감상적이어선 안될 대통령 방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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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미국방문은 한국대통령으로서는 가장 수월한 국빈방문이다. " 이것은 미 국무부의 스탠리 로스 아시아.태평양지역담당 차관보가 지난 5월15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21세기포럼에서 한 말이다.

새 정부의 대미 (對美) 관계가 그만큼 순탄하다는 것이다. 김대중정부의 대미외교는 이제 시작인데 클린턴정부의 고위관리가 한국의 대미자세를 이렇게 칭찬하는 데는 배경이 있을 것 같다.

사실 북한문제 하나만 가지고 봐도 미국은 김영삼정부한테 많이 시달렸다고 생각한다. 93년 11월 워싱턴의 정상회담도 그런 경우의 하나다.

두나라 실무진은 북한문제에 관한 일괄타결안에 합의를 했는데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은 회담장에서 이 합의를 뒤집었다. 일괄타결 방식으로는 북한에 이용만 당하고, 북한정책의 주도권을 미국에 넘겨주게 된다는 의심암괴 (疑心岩塊)가 이런 돌출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일괄타결 대신 '철저하고 광범위한 해결안' 의 합의로 회담은 끝났지만 김영삼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불신은 깊어졌다. 94년 김일성사망에서 제네바 핵합의가 이뤄지기까지의 과정에서도 한국은 미국이 가만히 내버려두면 무너질 북한을 살려내고 북한의 과거 핵개발도 불문에 부친다고 공격을 계속했다.

한국정부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클린턴의 반응은 민감했다. 대미외교의 첫단추를 끼우고 있는 김대중정부는 미국에 잘한 실적도 없고 잘못한 전력도 없다.

그러나 김영삼정부와의 차별화를 하기는 쉬운 조건이다. 김대중대통령 개인으로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적인 투쟁을 한 경력의 소유자로 취임후에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시추진을 강조한다.

미국사람들에게 그런 金대통령은 그들이 신봉하는 민주주의의 가치관을 경제발전과 같은 수준에서 중요시하는 '자랑스러운 친구' 로 비친다. 그렇다면 金대통령의 미국방문은 초등학생들의 소풍처럼 즐거운 나들이인가.

대통령이 되어 암울한 망명생활을 하던 제2의 '정치적인 고향' 으로 돌아가는 '금의환향 (錦衣還鄕)' 이요 로맨틱한 센티멘털 저니인가. 백악관 사정에 밝은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金대통령의 방문이 '축제분위기' 로 끝난다면 미국사람들은 실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당연한 얘기다. 미국은 金대통령이 한국경제의 구조조정 성과와 노동계의 지지를 들고올 것을 기대한다.

그래야 미국정부와 여론, 의회가 한국지원을 지지한다. 워싱턴 국제경제연구소의 프렛 버그스텐 소장은 클린턴정부와 IMF가 金대통령의 의회설득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사정에 밝은 경제학자 로렌스 크라우스는 金대통령이 서울에서 외제차를 타고 다녀도 안전한가, IMF사태로 한국은 얼마나 개방적으로 변했는가라는 질문에 답변할 준비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金대통령의 방미는 스탠리 로스의 말대로 그렇게 식은죽 먹기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IMF사태라는 발등에 떨어진 불, 어떻게든 출구를 찾아야 하는 북한문제, 동아시아 경제의 침몰위기, 21세기 동북아시아의 안보구조의 급변 등은 두 대통령에게 무거운 숙제들이다.

클린턴의 중국방문을 앞두고 한반도문제 해결에 대한 중국의 역할도 진지한 논의대상이다. 특히 그가 뉴욕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밝힌대로 미국에게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조건없이 해제하라고 촉구한다면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그것은 북한정책의 새 이정표를 의미한다. 금융지원에서는 제2선 지원이 까다로운 현안이다.

한국에 제공되는 구제금융 5백80억달러중에서 3백50억달러는 미국과 일본 등 부자나라들이 제공하는 것이다.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3백억달러가 넘어서는 지금 '꼭 필요한 경우에 제2선 지원을 제공한다' 는 요건 자체가 문제가 돼 있다.

이 문제에 관한 실무협의에 金대통령의 방미 (訪美) 분위기가 활용되겠지만 제2선 지원을 제공한다는 약속을 재확인하는 것 이상의 성과는 기대할 수 없다. 이 점이 金대통령에게는 적지않은 부담이다.

회사가 부도난 사업가들과 실직자들은 미국에서 그렇게 환영받는 金대통령이면 그런 문제도 해결하고, 월 스트리트에서 투자와 융자도 많이 끌어올 것을 기대한다. 북한문제가 한국에 의한 주도, 북한의 붕괴 재촉보다는 위기극복 지원, 미국의 제재완화 등 실천적인 문제에서 의견일치를 본 것은 정상회담의 분위기를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미국의 투자가들은 한국의 구조조정 내용과 속도를 수상쩍어 하고 정부가 아직도 노동계를 설득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는 자세다.

특히 金대통령의 의회연설은 감동적이어야 한다.

한국은 국제사회의 최소한의 지원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고, 미국과의 정책공조로 머지않아 한반도에 평화가 올것이고, 21세기의 아시아에서 한국은 미국의 전략적인 파트너로 필수적인 존재라는 큰 그림의 비전을 의회에서 제시해야 한다. 金대통령이 상.하의원들에게 자신이 지금의 경제위기를 해결할 능력을 가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 전체의 지도자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다면 그의 첫 방미는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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