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정상과 부실 사이 B는 괴로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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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중견 건설업체 A사의 김모 재무담당 이사는 지난 1월 자신의 회사가 은행의 신용위험평가에서 C등급(부실 징후 기업)을 면하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그의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파트 중도금 납입이 늦어져 일시적으로 돈이 돌지 않자 그는 주 채권은행에 신규 대출을 신청하려 했다. 그러나 은행에서 돌아온 것은 “신규자금을 신청하면 곧바로 C등급으로 강등시킬 수 있다. 6월까지는 대출을 기대하지 말라”는 답변이었다. 김 이사는 “6월까지였던 대출 금지령이 이젠 연말로 연장됐다”며 “상대적으로 부실이 적다는 B등급 회사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대상인 C등급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구조조정을 위한 경영평가에서 채권단으로부터 B등급을 받은 회사들은 대개 이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상과 부실 사이에 드리운 그늘이다. A등급 회사들은 대기업 그룹 계열사이거나 규모가 커 어려움이 덜하다. 또 C등급 회사는 워크아웃을 통해 채권 만기 연장과 신규 자금 지원을 받고 있다. D등급은 부실기업으로 금융 지원에서 아예 제외돼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낀 B등급 회사들은 실질적인 지원을 받지 못해 고립무원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원래 B등급은 ‘일시적으로 유동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만 심각하진 않아 자구계획 이행과 금융회사의 단기적인 추가 자금 지원을 통해 정상화가 가능한 기업’으로 규정돼 있다. 정상화하려면 단기적으로나마 지원을 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은행들은 B등급 회사에 대한 신규자금 지원을 꺼리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시중은행 여신담당 간부는 “자금을 지원하면 금융당국으로부터 등급 판정을 잘못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 구조조정을 총괄하고 있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합동의 기업재무개선지원단은 입장이 다르다. 지원단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B등급 회사에 신규자금 지원을 막은 적이 전혀 없다”며 “은행이 금융당국을 핑계 삼아 대출을 꺼리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면 회사채를 발행하거나 분양대금을 자산으로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하는 길이 열려 있긴 하다. 하지만 이론상 그렇다는 것이지, 현실적으론 쉽지가 않다. B등급을 받은 주택건설 전문회사의 대표는 “2월에 건설회사의 신용등급이 일제히 내려가 기존 채권의 상환을 제외한 신규 채권 발행은 꽉 막혀 있다”고 말했다. 또 은행권이 ABS 시장에서 손을 떼는 바람에 건설회사들은 저축은행이나 캐피털 등 2금융권을 상대로 연 12% 이상의 고금리로 ABS를 발행해야 할 처지다.


돈줄이 막혀 위태위태해 보이면 도와주기보다 서둘러 채권을 회수하려는 금융사도 있다. 은행 평가에선 B등급을 받았지만 대주단 협약을 통해 기존 채무의 만기를 1년간 연장받은 C사가 그런 피해를 보았다. 한 금융회사가 만기 연장에 포함된 어음을 돌리는 바람에 이 회사는 시중금리보다 두 배 이상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 막아야 했다. 금감원은 이를 알고도 “대주단 협약은 금융회사들끼리의 자율 협정이어서 금융당국이 이를 위반했다고 제재할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다산회계법인의 김규진 금융컨설팅본부장은 “경기가 갑자기 좋아지지 않는 한 상당수의 B등급 회사가 부실기업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고 말했다. 또 등급이 낮은 채권이나 ABS에 신용보증기금 등이 보증을 해줘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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