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병상의 시시각각

페르시아의 후예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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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사실 그럴 만하다. 고대 제국 페르시아의 영광,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거쳐 서구를 지배한 문명의 위대함은 중국 못지않다. 이슬람의 정통을 주장하는 시아파의 종주국이란 자부심은 아마 그 이상일 것이다. 30년 전 호메이니 혁명은 무슬림이 자랑하는 현대사의 대사건이다. 세계 문명의 기원, 절대종교의 중심, 그리고 국제정치의 리더라는 자부심이 뭉쳤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런 이란이 흔들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4·19와 광주항쟁이 한꺼번에 일어난 듯한 형국이다. 3·15 부정선거와 비슷한 일이 지난 12일 대통령 선거에서 자행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예상 밖의 대승을 거두었다. 부정의 흔적은 만연하다. 야당 후보인 무사비가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던 고향에서 패배한 것은 DJ가 호남에서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야당 우세 지역에선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를 못한 사람도 많다.

야당 지지 세력이 길거리로 나섰다. 5월 광주와 비슷하다. 수만 명이 수도 중심가에 모여 ‘알라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쳤다. 시위대가 민병대 초소에 접근하자 머리 위로 총탄이 쏟아졌다. 7명이 숨졌다. 시위대의 규모가 커졌다. 관계기관들이 인터넷과 무선통신을 차단하고, 외국 언론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공안당국이 심야를 틈타 주요 대학 기숙사를 급습했다.

사태가 쉽게 진정될 것 같지 않다. 페르시아의 후예들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한 내무부 관리는 ‘이란이 없다면, 나도 존재하지 않게 해주소서’라는 시로 심경을 대신했다. 그는 호메이니 혁명에 참여했고, 이어 이라크와의 전쟁에 종군했으며, 그의 형제는 순교자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 사태를 보면서 ‘조국에 바친 청춘이 헛된 희생이 됐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커질 것이라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란은 이슬람 신정(神政)국가며, 최고 종교지도자의 권위는 흔들림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지도자가 이끄는 헌법수호위원회가 대통령 선거 후보자들을 사전 심사, 4명의 후보만 남겼다. 개혁파 2명은 현직 대통령에 비해 약체였다. 아마디네자드는 집권 기간 중 석유가격 폭등으로 얻은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뿌리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인기가 높았다. 물론 대통령의 돈 뿌리기에 따른 인플레, 적대적인 대외정책, 억압적인 통치 방식에 대한 회의는 많았지만 그렇게 심각해 보이진 않았다.

예상 외로 사태가 커진 데는 여러 요인이 있다. 기본적으로 혁명 이후 30년간 쌓였던 문제들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 사실은 매우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레바논 선거에서 친서방 정권이 승리한 데서 드러났듯 오바마 효과도 적지 않다. 부시의 압박은 자존심 강한 이란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지만, 오바마의 스마트 파워는 미국을 ‘사탄’이라 주장해온 선전을 무력화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촛불시위처럼 인터넷과 휴대전화, 트위터 등 IT 기술 발전에 따른 통신혁명도 한몫했다.

이란 사태를 보면서 북한을 떠올리는 두 가지 이유. 첫째 이란의 정권이 친서방파로 바뀐다면 ‘악의 축’ 3국(이라크·이란·북한) 가운데 북한만 남는다. 미국이 북한 문제에 더 집중할 것이다. 둘째 이란처럼 정신적·군사적으로 중무장한 국가도 어느 순간 내부균열에 직면해선 쉽게, 급격하게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너무 커 안 보이는 불확실성이 문제다.  

오병상 편집국장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