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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11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변씨는 그제서야 가슴이 뜨끔했다. 승희가 본래 성품은 여리고 야들야들하지만, 위기가 앞에 닥쳤다 싶으면, 뚫고나가는 돌격성이 사내 못지 않고 속도감도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승희의 속내를 염탐한답시고 말만 넘겨짚고 있을 것이 아니란 생각도 얼핏 들었다.그녀의 속내를 그쯤 떠보았으면, 승희가 묵호댁의 본색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심증도 굳어진 셈이었다.

그리고 승희가 행중을 따라 장꾼으로 나선 사이에 봉환이가 가게에 남아 있도록 조처한다면, 그 사이에 남아 있는 두 사람이야 서로 엉겨붙어 피칠갑을 하든지 칼부림이 나든지, 행중이 한 장도막을 돌고 오면, 묵호댁은 떠나버리고 없을 것이 분명했다. 봉환에게 그만한 강단은 있을 것이고 방법도 없지 않을 것이었다.

방파제를 한 바퀴 돌아 선착장 앞에서 승희와 헤어진 변씨는 얼른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방구석에 있어야 할 봉환은 보이지 않았다. 짐작이 없지 않았던 변씨는 주변의 선술집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자포자기로 그리고 망각을 위하여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신 그를 찾아낸 것은 해질 무렵이었다.

혀가 굳고 하체를 제출물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그를 곁부축해서 끌고 돌아왔을 때야 학교 갔던 형식이도 돌아와 있었다. 우선 잠부터 재운 뒤에 새벽녘에는 숙취를 진작 걸러내기 위해 꿀물과 냉수를 번갈아 먹여주었더니, 겨우 올곧은 정신으로 돌아왔다.

변씨는 그 동안 가게를 드나들면서 염탐한 결과, 승희가 묵호댁의 본색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부터 실토정을 하였다. 봉환이가 제일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자신이 코앞에 있는 집을 찾지 않고 겉돌고 있는 것에 대한 승희의 반응이었다. 물론 그것도 묵호댁 때문은 아니란 것으로 이해하고 있더라고 둘러대었다. 누웠다 일어나 앉았다 하며 주저하던 봉환은, 오히려 승희가 집에 없는 것이 묵호댁을 내쫓기에는 좋은 기회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예상했었던 결과였다. 봉환의 결심이 그렇게 낙착이 된 이상, 하루라도 빨리 승희와 묵호댁을 떼어놓는 게 상책이었다.

한 장도막 동안은 집에 있겠다 했던 아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승희와 동행으로 도망치듯 주문진을 나선 것은 바로 그날 새벽이었다. 두서없이 떠난 길인데도 승희는 모처럼 소풍나온 여학생처럼 들떠 있었다. 버스터미널에서 새벽에 동해시로 떠나는 버스에 올랐다.

동해시까지도 수월찮은 노정이었지만, 명색이 준고속도로 일컫는 해안도로가 뻥 뚫려 있었기 때문에 주문진 떠나서 두 시간만인 오전7시가 채 못되어 다리 건너에 있는 북평동 장터에 당도하였다. 행정구역 개편 때 동해시가 되었지만, 북평이란 지명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 북평장터였다.

먼저 삼척장을 보기 위해 떠났던 행중은 아직도 삼척에 머물러 있을 것이었다. 삼척읍내장에서 북평장터까지는 기어온다 해도 20분이면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조급하게 서둘 까닭이 없을 것이었다. 불과 20분의 거리를 두고 강원도에서 큰 장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삼척장과 북평장이 하루 사이를 두고 열리고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우선 들어가 쉴 처소를 찾던 두 사람은 곧장 단념하고 길가에 방치해둔 살평상에 나란히 앉았다.

비닐장판까지 덧씌운 살평상에는 아침의 정갈한 햇살이 눈부시게 내려비치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 승희는 사뭇 크기가 부담스러워보이던 여행가방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데없는 비닐봉지에 싸인 김밥이며 오징어 순대를 슬금슬금 꺼내놓았다. 오늘 아침 주문진을 떠나게 될 것을 예측하고 마련한 요깃거리였다. 빗나가지 않았던 승희의 예측력에 놀랐으면서도 변씨는 말없이 김밥 하나를 골라들며 이죽거렸다.

"씨발. 오줄없는 늙은 놈 하나가 지 분수는 모르고, 귀때기 새파란 젊은 여편네를 꼬드겨 꿰차고 도망 나와서 이제 한숨 돌리고 길가에 앉아 아침 요기하는 형국이구만. "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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