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의 대가는 갚아 준다, 아주 확실하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8호 13면

‘인간사냥’은 1967년 ‘포인트 블랭크’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리 마빈, 앤지 디킨스 주연

“갚아야 할 빚이 있기에 죽을 수도 없는 악당 파커, 그가 지옥에서 기어 나와 배신자의 곁으로 왔다.”
리처드 스타크(1933~2008)의 『인간사냥』(1962)을 번역 출간한 동서문화사의 선전 문구다. 뭔가 크게 한판 벌어질 것 같지 않나. 바로 뒤엔 ‘냉혹하고 비정한 피와 폭력이 펼치는 액션 드라마’라는 표현이 이어진다. 선전문엔 과장이 섞이곤 하지만, 이 경우는 오히려 실제보다 더 절제돼 있는 편이다.

남윤호 기자의 추리소설을 쏘다 - '인간사냥'의 냉혹한 악당, 파커

파커는 그 정도로 폭력적인 캐릭터다. 제도권의 점잖은 말로는 옮기기가 어렵다. 단순한 폭력배나 살인마는 아니다. 냉철한 판단력, 치밀한 기획력, 대담한 실행력을 지닌 프로 범죄자다. 폭행·절도·협박은 물론이고 필요하면 살인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그것도 확실하고 효율적으로. 일반 추리소설에선 탐정의 총에 맞아 죽거나, 붙잡혀 감옥에 갈 신세다. 이를 주인공으로 발탁했으니, 동업자들이 파커를 ‘희대의 발명품’이라 부를 만도 하다.

그는 외모부터 거칠다. 움푹 파인 콘크리트 덩어리 같은 얼굴, 갈색 점토로 빚어 놓은 것 같은 두 손, 금방 바람에 날아갈 듯한 싸구려 가발 같은 머리카락, 사람을 두들겨 패기 위해 달려 있는 팔….

파커는 데뷔작인 이 책에서 짝패와 아내에게 배신당한다. 총을 맞고 빈사 상태에 빠지지만 극적으로 살아나 배신자를 찾아 나선다. 범죄 조직이 가로막자 그 조직을 상대로 혈투를 벌인다. 그를 지탱해 주는 것은 강철 같은 목적 의식, 바윗덩이 같은 몸뚱아리, 그리고 천부적인 범죄 기술이다. “대체 네가 적으로 돌리려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나 있냐”는 협박은 씨도 안 먹힌다. 오히려 파커는 이렇게 비꼰다.

“우체국보다는 더 큰 조직 같은데, 그 정도로 크다면 내 돈을 돌려주는 것쯤은 쉬울 것 아니오?”

책에 대한 반응은 작가도 놀랄 만큼 뜨거웠다. 범인과 탐정, 범죄와 수사를 축으로 한 추리소설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게 일단 신선해 보였다. 탐정은 잔챙이 엑스트라일 뿐이고, 범죄자가 어엿한 주인공을 맡았다는 것 또한 충격적이었다. 원래 스타크는 파커를 내세운 책을 한 권만 쓸 생각이었으나 출판사의 권유로 모두 24편을 쏟아 냈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의 한 갈래인 범죄소설, 즉 ‘로망 누아르(roman noir)’에 속한다. 암흑가 이야기란 뜻이다. 이쪽 바닥에선 그 외에 짐 톰슨의 『겟어웨이』(1959), 마리오 푸조의 『대부』(72),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다알리아』(87), 스콕 스미스의 『심플 플랜』(93) 등이 걸작으로 꼽힌다.

스타크의 본명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1960년 데뷔한 이후 무려 100여 권을 쓴 괴력의 작가다. 또 열 개가 넘는 필명을 섞어 써 팬들을 헷갈리게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스타크는 파커 시리즈 전용 필명이다.

한편 미국의 명문 시카고대학 출판부는 2008년 9월 파커 시리즈의 재출간에 나섰다. 젊은 세대에게 누아르의 맛을 보여 주기 위해서란다. 그런데 국내에선 여태껏 『인간사냥』 딱 하나만 소개돼 있으니, 이거 좀 심하지 않나 싶다. 도덕군자가 많아 누아르가 안 먹히는 건지, 출판사들이 영 신경을 안 쓰는 건지….


추리소설에 재미 붙인 지 꽤 됐다. 매니어는 아니다. 초보자들에게 그 맛을 보이려는 초보자다. 중앙일보 금융증권데스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