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의 컬처코드 (19) 명대사는 펜 끝에서 나오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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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밥은 먹고 다니냐?”는 명대사를 남긴 배우 송강호.

영화를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하는 것 중 하나는 명대사다.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에는 “옷도 못 입는 사람이 말은 왜 그리 지루하게 하는지”라는 대사가 있다. 스타일리쉬한 감독의 미적 고집이 엿보인다. 지식인의 저열한 바닥을 헤집는 홍상수 감독은 ‘생활의 발견’에서 “사람은 못돼도 괴물은 되지말자”는 대사를 썼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 중 이영애의 “너나 잘하세요”는 영화 전체를 한 마디로 응축한 명대사·명장면의 전범이다.

이창동 감독은 ‘박하사탕’에서 “나 돌아갈래”라는 설경구의 절규를 통해 지난 시대와 화해했다. ‘타짜’의 “나 이대 나온 여자예요”, ‘봄날은 간다’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도 속물근성, 사랑의 덧없음을 절묘하게 포착한 대사들이다. ‘말아톤’의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친구’의 "내가 니 시다바리가”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도 아직까지 회자된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서는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 “밥은 먹고 다니냐?”가 유명하다. 둘 다 송강호의 대사고, “밥은 먹고 다니냐”는 애드립이라 더 유명하다. 송강호는 ‘우아한 세계’에서는 “당뇨가 감기냐?”를, ‘넘버3’에서는 말더듬이 조폭의 “배배배배신이야”를 명대사에 올렸다.

사극 전문 이병훈PD는 최근 책 『꿈의 왕국을 세워라』에서 자신의 드라마에 나온 명대사들을 소개했다.

"의원은 병자를 보지 병자의 신분을 보지 않는다”(허준),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상도), “물도 그릇에 담으면 음식이다”(대장금),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배다. 배는 물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이산) 등이다. 현대극 ‘서울의 달’에서는 “서울 대전 대구 찍고 부산”을 소개했다. 당시 김운경 작가가 며칠 밤 포장마차를 들락거리다 옆자리 취객의 일과에서 착안했다. 서울에 올라온 서민들의 애환이 절로 느껴진다.

‘대장금’ 중 어린 장금(조정은)의,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도 있다. 천재의 면모를 한눈에 드러낸 명대사다. 원래 조정은은 조연이었다가 촬영 직전 주연으로 바뀌었는데, 당시 이영애의 아역으로는 외모가 달린다며 반대가 심했다. 이PD는 “어린 아이가 연기를 잘하면 시청자들도 예쁘게 봐줄 것”이라며 밀어붙였고, 2회에 나온 이 명대사 후에는 모든 잡음이 사라졌다고 회상했다.

이PD의 말속에 답이 숨어있다. 명대사는 그저 작가나 감독의 펜 끝에서만 탄생하는 게 아니라 배우의 명연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속 명대사들이 단지 말이 아니라 명장면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앞서 송강호가 출연작마다 명대사, 유행어를 쏟아내는 것도, 사실은 평범한 대사를 명대사로 ‘승격’시키는 빼어난 연기력 때문이듯 말이다. 그에게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뽑아내는 평범하지 않은 연기자’라는 평이 따라다니는 것도 그때문이고.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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