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그 때 그 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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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 가요사에서 1930년대 후반은 황금기였다.대중가요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레코드 판매량이 급증했다.

레코드회사들은 인기 작곡가.가수들을 확보하기에 혈안이었다. 김용환.이재호.박시춘.손목인.김해송 등 작곡가, 백년설.남인수.고복수.이난영 등 가수는 스타중 스타였다.

오케레코드는 당시 레코드업계의 독보적 존재로 스타의 산실 (産室) 이었다. 오케레코드가 업계에서 톱 자리를 차지한 것은 흥행의 귀재 (鬼才) 이철의 공로였다.

이철은 1938년 악극단 오케 그랜드 쇼를 설립,가요계에 또 한번 선풍을 일으켰다. 오케 그랜드 쇼는 39년 조선악극단으로 개명했으며, 초호화 진용을 갖추고 일본.만주.북중국에까지 진출해 명성을 날렸다.

악극은 원래 1920년대 신파극의 막간 (幕間) 쇼로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극장시설이 부실해 무대전환이 느렸기 때문에 막과 막 사이에 관객의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쇼를 도입했다.

처음엔 배우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재담을 하다가 나중엔 전문 가수.코미디언이 등장했다. 막간 쇼가 연극의 흥행을 좌우할 만큼 인기가 높아지자 노래가 주 (主)가 된 뮤지컬 형태의 악극이 생겨났다.

악극단의 시초는 1929년 권삼천이 설립한 삼천가극단이다. 처음에 악극은 1부 연극, 2부 쇼로 구성됐다.

그러다 해방후 미국 문물이 들어오면서 춤.노래.코미디가 한데 어우러진 버라이어티 쇼로 발전했다. 이 무렵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악극단은 조선악극단 후신인 김해송의 KPK악극단을 비롯해 10여개나 됐다.

6.25 후에도 악극의 인기는 계속됐다. 그러나 50년대말부터 영화.방송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으며, 70년대 들어와 명맥이 끊어져버렸다.

IMF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향수 (鄕愁) 상품' 이 인기를 끌면서 악극이 부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왕년의 악극 스타들이 모여 왕년의 화려했던 무대를 다시 꾸민다는 소식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IMF사태와 라이프 스타일 변화' 보고서는 최근 우리 사회에 두드러진 풍조 가운데 하나로 복고주의를 꼽고 있다.

도전보다 안정을, 미래보다 과거를 지향하는 현실도피적 경향이 고개를 들고 있다는 지적이다.지금 우리가 당면한 IMF 파도는 '그 때 그 쇼' 식 복고주의로 넘기엔 너무도 높고 거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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