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법 그대로 두되 시행 2~4년간 늦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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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한나라당은 8일 비정규직 근로자의 근무 기한을 2년으로 제한하고 있는 비정규직법을 현행 그대로 두되, 해당 조항의 시행 시기를 2~4년간 유예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한나라당은 이날 국회에서 환경노동위 소속 의원과 노동부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당정회의를 열어 노동부의 의견을 들은 뒤 이같이 결론지었다고 신성범 원내 공보부대표가 전했다.

한나라당이 비정규직 고용 제한 규정을 유예키로 한 것은 우선 급한 불부터 끄자는 의도에서다. 이대로 가다간 실업 대란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다음 달 1일이면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2007년 7월 1일)된 지 2년이 된다. 기업이 정규직으로 전환하든지 계약 해지하든지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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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에 따르면 그 규모가 70만여 명에 달한다. 이들의 90%가량이 중소기업에 근무한다. 중소기업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여력이 있는 데가 그리 많지 않다. 현행 비정규직 보호법을 손보지 않으면 수십만 명의 비정규직이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비정규직을 채용하고 있는 244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55.3%가 비정규직을 해고하겠다고 답했다.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겠다는 기업은 29.9%에 불과했다.

노동부는 올해 4월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한나라당도 정부와 같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 개정안은 국회 상임위원회(환경노동위원회)에 상정조차 안 됐다. 이 안에 대해 노동계가 강하게 반대해 왔다. 한국노총을 비롯한 노동계는 “사용 기간을 4년으로 늦추면 비정규직이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과 정책 연대 파기, 노사민정 대타협 파기 등을 거론하며 반발했다. 재계도 시큰둥했다. 2년 늦춘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2년 뒤에 같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이 달라질 기미가 없는 데다 2년 제한 규정 시행이 불과 2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한나라당은 고육지책으로 일단 유예로 방향을 튼 것이다. 노동계와 야당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비정규직 고용제한 기간(2년) 을 규정한 법률 조항은 손대지 않고 시행 시기를 담은 부칙을 손대자는 것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인 박준선(한나라당) 의원은 “기한 자체를 연장하는 정부 개정안의 경우 ‘법을 시행해 보지도 않고 개정하느냐’는 민주당과 노동계의 반발이 크기 때문에 일단 정부 안보다 더 양보하는 선에서 시행유예 방안을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방안도 앞날이 순탄할 것 같지 않다. 당정협의에서 노동부는 고용 제한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기존의 법률 개정안이 통과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계는 “법 적용이 유예돼도 비정규직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노총은 8일 성명을 내고 “한나라당의 방침은 노동 시장에 (비정규직을 양산시키는)부정적인 시그널(신호)을 준 것”이라며 “(시행을 위해)정규직 전환 지원책을 마련하라”고 주장했다. 민주노총 이승철 대변인은 “정부나 한나라당이 ‘실업 대란’이란 말로 위기감을 조성해 사용자에게 편향되게 법을 개정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재계는 일단 대량 해고 사태를 막았다고 안도하면서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라”고 입을 모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 황용연 기획의정팀장은 “노동부 안처럼 비정규직 고용 기한을 연장하거나 한나라당의 한시적 유예는 모두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고용 시장이 활성화되고 유연해지기 위해서는 기간 제한을 없애고, 정규직에 대한 과보호를 해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배상근 경제정책본부장은 “미국이나 영국처럼 비정규직 사용 기한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기찬·정효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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