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다모작 시대]3.가족은 굴레인가…원군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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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중견기업인 L건설 관리부장으로 지난해말 퇴직한 박모 (48.서울강서구염창동) 씨는 생활비조로 은행에 넣어둔 퇴직금 8천만원으로 우동체인점을 시작하려다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이후 가족관계까지 서먹서먹해지면서 집밖에서 겉돌고 있다.

"퇴직금을 합쳐 1억2천만원을 금융기관에 넣어두고 이자로 생활했지요. 그러다 몇 달후 아내에게 사업이야기를 꺼냈더니 '괜히 남은 돈마저 날리지 말고 집에 조용히 있으라' 며 면박을 주는데 이 사람이 나를 정말 걱정해주는 사람인가 회의가 들더군요. " 가족이 자신에게 있어 '굴레인가 원군인가' 새삼 생각하게 되더라는 얘기다.

평생 한 직장.한 직업고수가 불가능해진 다모작시대에 가장 필수적인 것은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 그러나 직장을 바꾸거나 특히 탈샐러리맨으로 전업할 경우,가족들의 지지를 얻기가 쉽지 않다.

지난해 부도가 난 S개발 임원으로 퇴직한 최모 (55.서울서초구서초동) 씨는 건강이나 자신의 취미를 고려, 귀농학교에 다니는 등 농촌생활을 설계했으나 부인과 자녀들이 '시골생활은 싫다' 고 반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최씨는 '일없이 놀며' 아내의 수입에 얹혀 사는 것같은 자괴심에다 점차 아내의 출근 뒷바라지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일로 굳어지는데 대한 심적 갈등이 겹쳐 병원치료까지 받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김모 (55.서울마포구연희동) 씨는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취미를 사업으로 연결시켜 가족들의 지지를 끌어냈다.지난해초 20여년간 근무했던 J은행에서 지점장을 끝으로 명예퇴직한 김씨는 사내에서도 유명한 골프광. 퇴직을 6개월 앞두고는 그는 아내에게 무작정 여성용 골프채를 사다주고 매일 연습장에 동행했다.

'골프공은 보기도 싫다' 던 부인이 남편의 끈질긴 노력으로 점차 취미로 삼게 되자 김씨는 지난해 가을 골프숍을 열었다.김씨는 "일과 가정을 분리,가게에서는 '여보' 라는 말대신 '관리이사' 로 부른다" 며 "큰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아내와 함께 근무하는 즐거움이 크다" 고 만족해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따르면 최근 남편이 창업자금으로 퇴직금을 쓰겠다고 하면서 부부간에 갈등이 빚어져 상담을 원하는 경우가 하루에도 10여건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그중에는 '법적으로 남편퇴직금을 부인이 관리하게 할 수 없느냐' 고 묻는 이까지 있을 정도. 곽배희 (52.여) 부소장은 "남편들이 퇴직금을 사업자금으로 쓸 때 일방적인 '통보' 형태라 부부간에 불화의 원인이 된다" 며 "서로가 자신의 위치를 인정한 상태에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양해를 얻는 대화가 중요하다" 고 말한다.

특히 아내가 취업했을 경우 남편이 가사를 적극 분담해주는등 역할전환에 대한 인식도 필요하다는 것. 실직한아버지의모임 김정대씨는 "직업을 바꾸거나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직장을 옮기고자 할 때는 가족들이 한 데 모인 자리에서 바꾸거나 옮기려고 하는 이유를 설명해서 가족들의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 첫째" 라고 말한다.

또 가족들이 만류하고자 할 때는 당사자에게 직접 하는 것보다 부모 등 웃어른을 통해 만류하는 편이 좋다.

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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