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지금 '환율전쟁']도쿄의 쿠데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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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세계적인 머니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일본이 사상 최대의 달러를 풀어 엔화가치 방어에 나선 것. 일본은행은 지난 10일 1백억달러 이상의 엔화를 매입하고 달러화를 매도하는 시장개입을 실시했다.

일본 외환보유고의 5%를 하루만에 쏟아부은 이번 작전으로 엔화 가치는 이날 달러당 1백33엔에서 1백28엔대로 4% 이상 수직 상승했다.일본의 외환시장 전망과 정부입장을 알아본다.

도쿄 외환시장은 여전히 불안감 속에서 여진 (餘震) 이 계속되고 있다.13일 오전10시. 도쿄 외환시장에는 "일은 (日銀) 이 또 들어온다" 는 소문에 엔화 가치가 삽시간에 달러당 1백26엔대로 치솟았다.

독일 마르크와 엔화의 대량 주고받기가 와전된 것으로 밝혀지자 시장은 다시 달러당 1백28엔대로 진정됐다.일은은 이날도 1백28엔대에서 간헐적으로 개입, 1차 저지선이 1백28엔임을 분명히 했다.

◇ 왜 개입하나 = 지난 9일 하시모토 총리가 발표한 종합경기대책에 "알맹이가 없다" 며 외국인 투자가들이 다시 엔화를 팔아치우기 시작하자 일은은 시장개입의 방아쇠를 당겼다.더 이상 내놓을 경기부양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여기서 밀리면 끝장' 이라는 통화당국의 위기의식이 작용한 것이다.

대장성의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신原英資) 재무관은 "총구에 총탄을 가득 재어놓았다.언제든지 필요하면 발사한다" 고 강력한 개입 의지를 표명했다.

주가 (株價) 유지도 시장개입을 하는 이유중 하나다.스미토모 캐피털의 사노 이치히코 (佐野一彦) 조사개발실장은 "엔화 약세 전망이 확산되면서 지난주 환차손을 우려한 외국인들의 주식 투매가 시작됐다" 며 "이들의 시장이탈을 막기 위해서도 외환시장 개입이 불가피했다" 고 분석했다.

엔화 약세→주가 약세→소비 불황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조치라는 분석이다.또 일은은 최근 3개월동안 금융시스템 불안을 막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시중에 풀어놓은 상황에서 이번 개입으로 1조엔 가까운 통화량을 흡수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얻었다.

◇ 성공했나 = 일단 기선제압에 성공해 '전투에선 이겼다' 는 평가를 받고 있다.우에하라 (上原治也) 미쓰비시신탁은행 자금운용부장은 "극단적인 엔화 매도에 제동이 걸렸다" 며 "다음주 선진7개국 (G7)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담을 목전에 둔 효과적인 개입" 이라고 분석했다.

엔화가치 급등에는 10일부터 미.유럽계의 펀드매니저들이 일제히 부활절 휴가에 들어가 일종의 '시장공백' 현상도 한몫을 했다.로버트 루빈 미 재무장관은 "엔화 방어를 위한 일본의 시장 개입을 환영한다" 는 발언으로 지원 사격을 했다.

그러나 모건 스탠리증권의 수석이코노미스트 로버트 펠드먼은 "시장 압력에 거스르는 외환시장 개입은 약효가 오래가지 않을 것" 이라고 비관적인 입장이다.

그는 "미.일간 경제 기초여건 (펀더멘틀)에 변함이 없고 금리격차도 여전하다" 며 "실물 경제의 변화가 확인되지 않는한 엔화 약세의 흐름은 변하지 않을 것" 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엔화 강세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금리.주가는 여전히 맥을 못추고 있다.시장전문가들은 하시모토 총리의 경기부양책도 예산안을 짜 실제 집행되기까지 대략 3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 기간중 인위적인 시장개입 외에는 엔화 약세를 저지할 방법이 없다고 보고 있다.

◇ 열쇠를 쥔 미국 = 슈로더 증권의 애널리스트인 요시무라 다이 (吉村太) 는 "일은의 단독 개입으론 한계가 있다" 며 "미국의 협조개입이 없으면 엔화 약세 전망을 희석시키지 못할 것" 이라고 분석했다.지난해 12월19일 일은은 1백억달러 가까이 시장개입을 했으나 반나절의 반짝효과로 끝나버린 바 있다.

미국은 일단 "과도한 엔화 약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로렌스 서머스 재무부 부장관) , "미국 환율정책에 변함은 없다" (루빈 재무장관) 는 묘한 입장이다.

일은의 시장개입은 허용하되 공동 개입할 의사는 없다는 것이다.요시무라는 "엔 강세 - 달러 약세는 외국인 투자가의 미국 이탈을 불러 뉴욕 증시의 폭락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며 "현재 미국이 달러강세 정책노선을 전환했다는 증거를 찾기 힘들다" 고 말했다.

도쿄 =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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