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버킹엄궁 앞의 사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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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아시아와 유럽 스물다섯 나라에서 오신 대통령과 총리 여러분, 빡빡한 아시아.유럽정상회의 (ASEM) 일정 때문에 얼마나 고생 많으셨습니까? 이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폐하가 베푸는 만찬만 남았으니 잠깐 기념촬영을 하겠습니다.자 줄을 정돈하시고 다같이 치이즈 하시죠. " "치즈는 프랑스 말로 프로마주요. 프로마아주 해봤자 웃는 표정이 나오겠소?그냥 찍읍시다." "그러면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말씀대로 그냥 찍겠습니다.맨 앞줄 왼쪽 끝에 앉으신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께선 왜 아래만 내려다보십니까, 고개 좀 드시죠. " "불 싯 (Bull shit) IMF!" "IMF는 소똥이나 먹어라 그 말씀이신가요. 그 옆의 김대중 (金大中) 한국 대통령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까지 말할 순 없고요. 어쨌든 그들의 처방이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한마디로 힘듭니다." "영어 연설도 힘드셨죠? 자 자, 너무 눈을 깜박이지 마시고, 한국 국민에게 줄 선물 - 경제위기 탈출계획은 마련하셨나요?" "그거면 됐다라고 생각할 만큼 흡족한 대책을 마련하기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잖습니까.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그래도 金대통령께선 이번 회의에서 주룽지 (朱鎔基) 중국 총리와 함께 스타가 되지 않았습니까. 맨 뒷줄에 서있는 朱총리, 안 그렇습니까. " "스타 자리를 사양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른바 주룽지 개혁은 60~70년대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아류 (亞流)에 불과합니다.

노동과 자본투입을 극대화하고 공공과 민간의 효율을 높이는 신풍운동을 펴면서 성장률 8%를 넘는 양적 팽창을 꾀하는 것은 한국에선 이미 다 해본 일 아닙니까. " "너무 겸손하지 마십시오. 인간사회는 역사적 기원이나 문화적 유산과 관계없이 점점 균질화 (均質化) 돼가는 법입니다.경제적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는 모두 비슷해집니다." "싱가포르에서 온 고촉통 (吳作棟) 이 한 말씀 드리리다.만약 그것이 아시아적 가치는 없다는 서구학자들의 말을 뒷받침하는 것이라면 나는 반댑니다.상호간의 의무를 지키고 공동체의 질서를 추구하는 유교적 전통은 살아 있다는 우리의 국부 (國父) 리콴유 (李光耀) 선생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블레어 영국 총리의 신사회계약도 비슷한 성격입니까?" "비슷합니다.일 안 (못) 하고 연금.기금.수당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을 일터로 내모는 것이 골자입니다.이런 집이 지금 다섯가구에 하나꼴입니다." "거 참, 한국에선 일 안 (못) 하는 사람들에게 줄 돈을 마련하느라 야단인데…. 어쨌든 자유민주와 자유시장 사이엔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일본 총리께선 왜 아까부터 푹푹하고 계시죠?" "도대체 일본경제가 붕괴 직전이라는 말을 누가 꺼냈습니까?

8천억달러의 해외자산에다 2천억달러의 외환보유액을 자랑하는 일본이 그렇게 간단히 무너집니까?

내 돌아가면 미국의 무디스인지 뭔지 하는 신용평가기관, 혼을 내주겠습니다.

그런데 당신 사진이나 찍지, 웬 말이 그렇게 많아요?

당신 누구요?" "나는 프랜시스 후쿠야마라고 부르는 미국 사람입니다.

내가 쓴 '역사의 종말' 이라는 책은 꽤나 읽혔죠. 전대미문의 물질적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지금 세계 지도자들이 모여 실업걱정이나 하고 있으니 역사발전은 끝난 것 아닙니까. 버킹엄궁을 지나다 고명하신 분들이 모였다기에 사진을 찍는 겁니다.그래서 버킹엄궁 '앞의' 사진사라고 소개하지 않았습니까. "

김성호<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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