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대통령의 고뇌와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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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그가 겪어 왔던 인간적인 고뇌와 국가적 고민은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시대를 함께 살아왔던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 할 것 없이 다같이 나눠 가진 경험이었다. 다만 그의 삶과 죽음이 유달리 격렬하고 극적이었기에 지금 우리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흐를 뿐이다.

그의 인간적 삶의 고뇌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어쩔 수 없는 괴리를 한사코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남다른 고집과 열정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그의 사회정의 실현에 대한, 특히 불평등의 극복에 대한 열정은 가히 종교적 신앙에 가까웠다. 그러나 인간사회에서 완벽한 정의와 평등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불의와 부정한 세력이 만든 결과에 못지않게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에 직면할 때 충족되지 못한 정의에 대한 갈망은 인간적 고뇌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의·자유·평등과 같은 규범의 실현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정치의 원리다. 따라서 단순한 투쟁보다는 지혜로운 타협을 통할 때 정치는 ‘가능의 예술’이 된다. 이런 이치를 소화하기까지는 많은 인간적 고뇌를 겪어야만 하는 대가가 뒤따르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경우에는 정의와 평등에 대한 집착이 워낙 컸기 때문에 현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실망과 고뇌도 남다르게 극심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인간적 고뇌에도 불구하고 노 전 대통령은 인간의 한계를 자연과 운명으로 이해하려는 시인의 정서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그의 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정치인이, 더구나 대통령을 지낸 분이 남긴 유서로는 드물게 오래 기억될 시구(詩句)와 같은 몇 줄을 우리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슬퍼하지도, 미안해하지도, 원망하지도 말라면서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라고 맺은 그의 결론은 우리 한국인이 이 땅에서 수천 년 간직하여 온 민족적 심성에 직결돼 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특히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막중한 책무를 짊어진 대통령으로서 수다한 과제와 선택에 직면하고 해결책을 찾으려 고민에 빠진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분단 60년이란 민족적 비운을 어떻게 뛰어넘느냐 하는 역사적 과제는 역대 대통령도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짐이었으며, 노 전 대통령의 경우엔 더욱 더 무겁게 짓눌렸는지도 모른다. 첨예한 대결 구도가 지속되고 있는 남북관계와 국제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연계하여 정책과 전략을 펼쳐갈 것인가라는 과제는 한국의 대통령이 외롭게 부딪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숙제인 것이다.

이 어려운 함수관계를 풀기 위해 열정의 정치인이었던 그가 감정과 조바심을 자제하고 세계사의 큰 물줄기 속에서 나라의 운명을 이끌어가는 과정은 나름의 고민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얼마나 호감을 갖고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으로서 국제정치에서의 미국의 위치,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가능케 하는 데 기여한 한·미 관계의 중요성에 대하여 적절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믿는다. 취임 전 대통령당선자로서 만난 그분이 다른 무엇보다 한·미 관계의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많은 것을 질문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대미외교팀의 인선, 이라크 파병, 특히 한·미 FTA 타결 등이 바로 그분의 고민 어린 선택의 결과였을 것이다.

나는 또한 그분이 북한을 얼마나 걱정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평생을 반독재·민주화투쟁에 앞장섰던 그로서 북한 체제나 지도자를 긍정적으로 보았을 리는 없다. 인권변호사를 천직으로 알았던 그였기에 오늘의 북한 상황에 눈감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으로서 우리 국민의 여망인 통일된 민족공동체 건설에 기여해야 되겠다는 사명감 때문에 많은 고민에 휩싸였을 것이다.

이렇듯 뒤얽힌 국정의 선택지(選擇肢)를 적당히 포장하거나 덮어버리는 유혹을 뿌리치고, 고민과 고뇌를 거듭했던 정치지도자로 노 전 대통령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