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주지경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부터 젊은 승려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불교혁신운동은 사찰령 (寺刹令) 의 철폐와 주지 (住持) 제도의 개혁이 목적이었다.

총독부는 불교계를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 소위 사찰령이란 것을 선포, 총독과 도지사로 하여금 친일승려들을 전국의 본사 (本寺) 및 말사 (末寺) 주지로 임명해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일제 (日帝) 의 앞잡이가 된 이들 친일 주지들은 반일 승려를 내쫓고 사찰의 수입을 횡령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하지만 젊은 승려들의 개혁운동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번번이 좌절됐다.

사찰의주지란 본래 '안주 (安住) 하여 법을 유지 (維持) 한다' 는 뜻으로 일종의 '봉사직' 인데 일제의 불교정책이 주지를 돈과 명예와 권력의 상징처럼 만들어준 것이다.

해방 이후 탁발 (托鉢) 공양시대에 접어들면서 주지는 대중들의 공양 뒷바라지나 해주는 살림꾼으로 수행의 시간만 빼앗길 뿐 아무런 소득도 없는 자리로 전락했다.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니 서로 맡지 않겠다고 떠넘기거나 서열대로 돌아가면서 맡기에 이르렀다.

60년대에들어서면서 주지자리가 다시 노른자위로 떠오른 까닭은 우선 국민소득 수준의 향상으로 탁발을 하지 않아도 좋게 된데다 시줏돈이나 관광사찰의 관람료 징수 등으로 사찰의 수입이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주지자리를 놓고 매관매직을 방불케 하는 은밀한 혹은 공공연한 뒷거래가 이루어지는가 하면 정치판을 꼭 빼닮은 갖가지 권모술수가 판을 치기도 한다.

사찰이 생겨나기 전 부처는 밤새 편안히 주무셨느냐는 아침인사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기쁨과 근심을 여의어서/맑고 편안하게 빈 마음이 된 자/나고 꺼짐이 없는 도를 깨달아/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자만이/길이 편안한 잠자리를 얻나니라. " 이 말을 들은 수다타가 사찰의 필요성을 깨닫고 최초의 절인 기원정사 (祇園精舍) 를 지어주었다고 전한다.

온갖 명리 (名利) 를 초월해야만 절의 참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재작년 여름에는 인각사 (麟角寺)가 주지스님을 '공채' 해 주목을 끌더니 이번에는 동화사 (桐華寺)가 주지를 경선키로 해 화제가 되고 있다.

경선이 반드시 최선의 방법이랄 수는 없겠지만 '잿밥' 싸움의 인상을 얼마쯤 불식시킬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