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7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승희가 철규의 숙소인 변씨집으로 찾아온 것은 밤 11시를 넘긴 시각이었다.찾아가보라는 봉환의 성화에 견디다 못해 언덕바지에 있는 자취방까지 찾아온 것이었다.밤도 깊었으므로 내키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는데, 변씨까지 가세하여 채근하고 나섰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선착장 동쪽에 있는 방파제로 나섰다.

밤이 깊었지만, 부두 근처는 아직도 시끄러웠다.방파제에 드문드문 켜둔 가로등 아래로 비켜나서야 선착장의 소음이 저만치 물러났다.얼떨결에 승희를 다독거려 보겠다는 약속은 했었지만, 두 사람만 호젓한 시간을 갖게 되자, 어색해지면서 말문이 막혀버린 것은 물론이었고, 걸음걸이조차 자연스럽지 못했다.거북한 침묵을 견딜 수 없었던 승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초저녁에 식탁에 앉아서들 무슨 말씀들 나누었는지 짐작하고 있었어요. 제 책임이 커요. 아까 식당 나가신 뒤에 봉환씨가 고함을 질러대면서 얘기했었어요. 어쩌다 변씨에게 우리들 사이가 물과 기름처럼 겉돌고 있다는 얘기를 내쏟아버렸던가 봐요. 하지만 노력하고 있으니깐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그러나 저에게도 걱정은 있어요. 동거하기로 한 것이 진실이 아니란 것을 봉환씨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겠지요. 그 때 봉환씨가 받을 고통을 생각하면 두려워요.

착각 때문에 자신의 열정이 헛되게 바쳐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성질이 불같은 봉환씨를 손쉽게 제지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도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죠.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제 행동이 분명해져야 하겠죠. 그런데…,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아직까지는 내키지 않는 걸 어떡해요. 저도 제 자신을 잘 모르겠어요. 그런 여자들이 의외로 꽤 많은가 봐요?"

"그럴거야. 사랑하는 사람의 가치를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도 많지만,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지. 결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일찍 깨닫고도 예사스런 얼굴로 가정을 빈틈없이 꾸려나가는 여자도 부지기수야.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남자와 현실에서 생활하고 있는 남자를 냉정하게 양분시켜서 그것들대로 온전한 사랑으로 보전하며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가진 동물은 여자들뿐이야. 여성들의 그런 양면성을 장려할 것은 못 되겠지만, 그렇다고 비난할 수도 없지. 여자들이 곧잘 혼자 앉아 서럽게 우는 것은 자신들이 가진 선천적인 양면성에 대한 카타르시스가 아닐까?"

"아는 척하지 마세요. 여자들이 복잡한 생물이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지만, 여자 자신들도 모르는 일을 하물며 남자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어려운 걸 알려고 하지 말고 봉환씨처럼 단순해보세요. 그게 살기 편하실 걸요. " "승희가 심정이 복잡한 여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대화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가 승희를 설득하겠답시고 뒤따라 나온 건데, 되레 설득을 당하고 있잖아? 한 마디만 할게. 승희야말로 복잡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단순한 여자라고 생각해. 가치관이니 인생관이니 하는 것들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어. 결정했으면, 눈 딱 감고 그 결정대로 따라가봐. 나도 그렇게 하고 있잖아? 봉환을 받아들인다 해서 승희란 여자가 이 세상에서 소멸되는 건 아니잖아. " "차라리 소멸되고 말았으면…. "

진고개에서 있었던 단 하룻밤의 잠자리가 이렇게 길고 질긴 여운으로 남아 있다니. 그 질긴 여운의 정체를 알고 싶었던 것이 승희의 가슴속에서 회오리치던 진심이었다.

거기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을 것 같기도 했었다.그런데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말이 좀처럼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그래서 말이란 정체도 희미한 불빛이 벽에 그리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밤을 지새우며 방파제를 걷는다 해도 해석해낼 수 없는 불가사의가 자신의 가슴속에 어른거리고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