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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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제2장 길위의 망아지

봉환이가 코앞에서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채근하고 있는데도 철규는 쉽게 말문을 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가 내뱉을 한 마디 말은 필경 승희와 봉환의 장래에 어떤 전환의 계기를 가져다줄 것 같은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봉환이가 던진 질문의 골자도 불분명했다.

이를테면, 봉환이 자신과 승희 사이에 가로놓인 앙금의 정체를 올바르게 해석해달라는 것인지. 홀아비 된 변씨의 구겨진 인생에 대한 진단을 명쾌하게 따져달라는 것인지 종잡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모두들 목청껏 떠들어대고 있는 선술집 목로에 앉아 애매한 얼굴로 주저만 하고 있다 해서 흐지부지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벌겋게 충혈된 봉환을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장난이 아니고, 승희와 진지하게 포옹하며 입 맞춰본 적 있어?" "입에서 구린내가 날까 싶어서 칫솔질까지하고 해본 일이 있심더. " "승희 반응이 어땠어?" "키스할 때마다 낄낄대고 웃습니더. " "다음부터 웃을 때마다 따귀를 때려줘. 따귀 이상은 때리지 말고. " "맞심더, 형님 말씀이 참말로 그럴듯하네요. 저 가시나가 낄낄거리고 웃을 때는 사람 무시한다는 기분이 딱 듭디더. 안그래도 엎어놓고 지근지근 밟아버리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습니더. 그런데 절대로 손찌검을 안하기로 약조를 한 터라, 폭력을 행사할라카이 그기 걸려서 참는 데 애를 먹었습니더. 그런데 형님, 웃는 얼굴에는 침도 안 뱉는다는 말이 있는데, 웃는 낯짝에 대고 다짜고짜 주먹질을 한다 카면, 분명히 책이 잡힐낀데요?" "그렇다 하더라도 차라리 왜 하느냐고 소리지르며 대들지언정 웃지는 말라고 해. "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짐작은 할시더마는 내가 구변이 없어서 앞뒤 아구가 딱 들어맞도록 이바구를 둘러댈 재간이 없습니더. 형님이 승희한테 조용하게 알아듣도록 구슬려주면 좋겠습니더. 나는 몇 마디 지절거리다가 말문이 막히면, 나도 모르게 뒤통수에 열불이 확 오르면서 주먹부터 나갈라캐서 이바구가 안돼요. " 듣고 있던 변씨가 또 다시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젊은 혈기 있다고 여자를 완력으로만 다룰 생각은 아예 버리라고 내가 얘기했잖여, 한선생이 따귀 때리랬다고, 그 험악한 손바닥으로 눈알이 쑥 빠지게 뒤통수를 내려치진 말고 그냥 때리는 시늉만 해. 알았어?

그렇게만 겁을 줘도 승희는 충분히 알아듣는 여자라구. 맞았어. 한선생이 승희를 조용한 데 데리고 나가서 잘 달래주는 게 좋겠소. " 변씨나 윤씨의 충고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지만, 철규의 말이라면, 마음 속에 새겨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변씨도 그렇게 권유한 것 같았다.

삼가며 잠자코 있었어야 했을 대화에 뛰어들었다가 짐만 얻어진 꼴이었다.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하자고 얼버무리고 나서야 옆자리에 앉아서 안주 수발하던 태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청 어느 구석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리대에서 안주 마련에 눈코 뜰 사이가 없는 승희도 아는 척을 않았다.

그러나 한참 뒤에 미닫이를 밀고 들어서는 태호의 두 손에 묵직해 보이는 소주 한 궤짝이 들려 있었다.

한꺼번에 들이닥친 손님들로 일손이 모자라서 쩔쩔매고 있었던 승희를 거들어 도매상점까지 다녀온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태호는 목로를 훔치고 찬그릇을 나르는 잔심부름까지 마다하는 기색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주정꾼들의 비위까지 맞추고 있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변씨는 기특하고 대견스러웠던지 몇 번인가 태호를 손가락질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근해의 어장으로 나가서 조업이랍시고 손바닥이 닳도록 그물질을 해보았자 생선은 잡히지 않는데, 선술집에서 팔리는 소주 소비는 늘어만 가는 것이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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