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7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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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도둑질 당한 명태의 수효는 몰래 벌충시키기로 합의를 보았기에 다소 느긋해진 그들의 관심은 다시 승희에게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세 사람이 똑같은 심정이었지만, 오랜만에 만나본 승희의 모습은 유달리 애잔하면서도 곱상스러웠다.아침저녁으로 격의없이 들락거리며 상종했던 때와는 전혀 다르게 금방 목욕탕 문을 나서는 여자와 마주친 것처럼 풋과일 같은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느낌뿐만 아니라 그들이 당도하기 직전에 실제로 목욕탕을 다녀왔는지도 몰랐다.그 뿐만 아니었다.선반에 가지런하게 진열시켜둔 그릇들도, 날짜를 잡아 일제히 때를 벗긴 듯 유난히 반질거렸다.변씨는 얼굴이 수수떡처럼 벌겋게 상기되어 목로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승희의 푸짐한 엉덩이를 쉴새없이 곁눈질하고 있었다.그러나 나잇값을 한답시고 입으로는 봉환을 다독거리고 있었다.

"젊은 혈기만 가졌다 해서 계집이 길들여지는 줄 안다면, 큰 오산이야. 사나운 개를 길들인다고 생각해봐. 개새끼들이란 게 물론 생고기를 자꾸 던져주면, 길길이 날뛰며 좋아하겠지. 그러나 생고기만 먹이다 보면, 그 놈이 더욱 사나워질 수는 있겠지만,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고 주인을 두려워할 줄 아는 개로 길들일 수는 없어. 씨발 뭔지 알어? 정답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직 칭찬이야 씨발. 잘잘못을 따지지 말어. 개와 계집은 모두 개짜돌림이지만, 개는 잘잘못을 정확하게 가르치고 훈련을 시켜야만 충견으로 만들 수 있지만 계집은 그런 게 아녀. 잘해도 칭찬, 못해도 칭찬이여. 저건 내 계집이다 하고 점을 딱 찍어 놓았으면, 그날부터 남이야 미련한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남이야 쓸개 빠진 놈이라고 욕을 하든 말든, 죽자살자 칭찬만 해줘 씨발. 걸핏하면 미주알고주알 까발려서 이건 잘하고 저건 못했다고 조목조목 따지고 면박주지 말란 말여. 그런 사내자식 두고 계집들이 뭐라는지 알어? 저 새끼 개새끼라 그래. 두 놈을 놓고 실험을 해봐. 한 놈은 밤낮 할 것 없이 만났다 하면 발가벗고 흘레만 붙어주고, 한 놈은 색 밝히는 능력은 별로지만, 만날 때마다 니 잘한다고 니 곱다고, 주둥이에 침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고 쓰다듬어줘봐. 그 계집이 결국은 누구 품에 안길 것 같어? 그것 잘해주는 놈하고 붙을 것 같지? 천만에 말씀이여. 안 그래. 니가 한 번 실험을 해봐. 개하고 계집이 다른 점이 바로 그거여. " "형님 말씀이 그럴듯한 스토리이기는 하네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화 안 내지요? 화 안 내신다카이 말인데, 형님 홀애비 신세 된 것도 상습적으로 미주알 까발리다가 낭패를 당한 깁니껴?" "이 사람이? 자기 장래를 생각해서 알아듣게 얘기를 해주면, 고맙게 알고 다소곳하게 듣고 있기나 할 것이지, 꼭 배알을 부려서 남의 뒤통수를 치고 나온단 말이야. 하지만 내가 화내지 않겠다고 약조를 했으니 조용히 얘기하는 줄이나 알어. 그년이 집을 떠난 것도 요즘 와서 생각해보면, 눈이 마주칠 적마다 행세 고약하다고 면박을 주고 개 잡듯이 욕을 퍼부었던 게 원인이라 할 수 있었지 씨발. 그런 쓰디쓴 과거사가 있기 때문에 자네같이 철없는 인생후배한테 찌개백반같이 영양가 있는 말을 해줄 수 있는 게야. 그년 얘기는 더 이상 묻지 말어. 속에 열불나. " "그기 바로 소 잃고 마구간 곤친다카는 기라요. 애지중지해야 할 내 마누라는 놓친 사람이 무슨 빤지가 있다고 인생후배한테 찌개백반을 떠먹여요? 성인군자 같은 말씀을 몰라서 안 하는 줄 알아요? 해볼라 케도 안 되니까 못하지.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껴?" 봉환이가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기만 하고 있는 철규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 대화에 끼어들기가 난처했던 철규의 거북한 입장을 봉환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기에 철규가 대꾸할 때까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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