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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의 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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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람에게는 누구나 현시욕(顯示慾)이 있다. 남에게 인정받고 남보다 도드라져 보임으로써 존재감을 확인하려 한다. 그래서 무시나 모욕을 당하면 목숨까지 내걸게 된다. 200년간 원수지간이던 미국의 두 가문이 마침내 화해했다는 최근 뉴스만 해도 그렇다. 각각 재무장관과 부통령을 지냈던 두 집안의 선조들은 상대가 자신을 '믿지 못할 사람'이라고 험담했다는 이유로 결투를 벌여 한쪽이 죽었다. 이처럼 타인에게서 대접받고 싶은 건 생래적인 욕망이다. 따지고 보면 정치나 경제, 학문과 예술도 모두 남보다 자기(이름)를 더 알리고 싶은 인정(認定)투쟁이다. 멋지고 고상해 보여도 한풀 벗기면 자기만 봐달라고 투정하고 앙탈하는 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세상에서 자신을 감추고, 자신이 잊혀지길 원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 중 한명이 일체의 신상 정보를 거부하고 가명으로 작품을 썼다고 한다(본지 7월 12일자 29면). "작품이 순수하게 읽혀지길 원하기 때문"이란다. 작가라는 인격체 대신 작품만이 기억되길 바라는 이런 자세에는 은둔자적인 풍모마저 느껴진다.

'은둔의 작가'하면 '호밀밭의 파수꾼'의 D H 샐린저가 떠오른다. 올해 85세인 그는 언론에 노출되는 걸 극히 꺼리면서 수십년째 미국의 한 시골에 칩거 중이다.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을 유작으로 남기고 1999년에 작고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도 일생 작품만으로 발언했다. 두 사람은 결벽(완벽)주의여서 책 표지나 포스터의 광고 문구 토씨까지 자기 허락을 받도록 했다.

사실 거슬러가면 문학과 예술의 뿌리는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닿아 있다. 개인으로서의 작가.예술가는 근대의 산물이다. 모든 작품이 무명씨(無名氏)로 이루어진 세계를 그려본다. 그런 세계에서도 작품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거는 재능과 용기를 가진 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진정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현시욕이나 허영이 꼭 나쁜 건 아니어서 창작을 추동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좀 뜬다 싶으면 신변잡기나 보잘것없는 고생담으로 자기를 팔고, 허명(虛名)에 집착하는 이들이 지천으로 널린 환경에서는 가명으로 은둔을 자처하는 젊은 작가의 결기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이영기 문화부 차장